복수는 달콤해
올봄-어느 일요일, 난 가출을 했다. 날씨가 유독 맑고 좋았던 것이 문제였다.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날씨가 좋으면 산책을 나가고 싶어서 초조한 강아지의 심정이 된다. 그런데 남편은 게임을 한다고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고, 방에서 혼자 놀던 딸은 산책 나가자는 내 말에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굴린다. 이 두 사람은 내가 없으면 이 좋은 날씨 누릴 줄도 모르고 만화 보고 티비보고 게임하느라 이 아까운 계절을 다 낭비해버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욕 좀 먹어도 기어코 너희에게 날씨를 누리는 행복을 알려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매번 투덜대는 둘을 끌고 나가고야 만다.
그날도 남편은 똑같이 게을렀고, 딸은 똑같이 투덜댔다. 평소 같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적당히 강제적으로 둘을 끌고 나갔을 터였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으로 둘을 데리고 나가기에는 일단 1. 날씨가 너무 좋았고, 2. 딸이 남편과 속닥속닥 내 흉을 보는 것을 듣고 말았다-는 점에서 사건의 전개가 평소와 크게 달라져버렸다.
투덜대든말든 '여보는 빨리 게임 그만하고, 우진이도 그만 투덜대고 빨리 산책하고 오자-!'라고 선언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는데 아이와 아빠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자기끼리 '아 정말 나가기 싫다. 엄마는 왜 저래' '그렇지?'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서운해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하고 속상했다.
" 그래 나가지마_!!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그냥 둘이서 티비보고 게임하고 밥 시켜 먹고 만화 보고 그냥 집에 처박혀있어_!! 나는 나갈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현관문을 꽝 닫고 나왔다. 터덜터덜 큰길로 걸어 나오는데, 어우 정말 둘이 어쩜 저렇게 날씨 즐길 줄 모르는 것도 똑같지? 정말 세상 지루하고 답답하네.. 둘이 나 없이 지내보라지 집에서 찐따처럼. -저주를 퍼붓듯 분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쌓였던 답답함이 생각보다 컸던 것일까. 쿵쾅거리는 심장에 맞춰 쾅쾅 거의 뛰듯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를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던 내 시야에 저 멀리서 나를 찾아 급하게 따라 나온 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반항을 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흥 내가 전화를 받아봐라. 그냥 오늘 하루 종일 안 들어갈 거야. 둘이 나 없이 얼마나 즐겁게 지낼 수 있는지 한번 지내보라지. 몇 시간만 지나도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샘솟을 것이야!'
그때 저 만치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한 대가 보였다. 어디로 갈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세요?"
라는 택시기사님의 질문에 떠오른 것은 어이없게도 '마라탕'이었다. 남편도 싫어하고 아이도 싫어하는, 나만 좋아하는 마라탕. 그래서 여간해서는 잘 먹지 못하는 마라탕. 어딜 가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순위가 가장 아래로 밀려나서, 남편이 좋아하거나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먹어야만 했던 설움도 한 번에 밀려왔다. 그래 마라탕 먹으러 갈 거야.
"** 백화점으로 가주세요"
백화점 지하 식당코너에서 파는 맛있는 마라탕을 떠올리며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했다. 버럭 그렇게 극적으로 화를 내고 나와서는 기껏 가는 곳이 백화점이라니- 머쓱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통쾌하고 달콤한 기분이 몰려왔다. 그래 오늘은 그동안 남편 눈치 아이 눈치 보느라 못 먹은 것도 다 먹고 구경할 것도 다 하고 그럴 거야! 이런 다짐과 함께.
백화점이 보일 때 즈음 문자가 왔다.
-어디가? 택시 타는 거 봤어.
남편의 문자다.
-내가 어디 가는지 알아서 뭐하게. 그냥 오늘은 둘이서 집에서 하루 종일 티브이 보고 치킨 시켜먹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답문을 보내고 나니 웃음이 실실 났다. 내가 이러고 싶어서, 산책을 핑계로 화를 내고 둘을 떼어놓고 온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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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러, 또는 아이 옷을 사러 자주 가는 백화점인데도, 아이 없이, 남편 없이, 자유로울 자격을 든든하게 등에 업고 들어선 그곳은, 전과는 전혀 다른 설렘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남편이 좋아하는 의류 매장이었다. 주로, 나는 지루해하는 아이를 달래는 동안, 남편은 여유롭게 열 벌씩 천천히 입어보고 사던 곳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던 브랜드인데, '복수를 하겠다!'는 묘한 반항심이 나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너만 여기서 한가롭게 쇼핑할 줄 아냐? 나도 쇼핑할 줄 알거든?! 내가 정말 오늘 스무 벌 오십 벌 입어버리겠어!!'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들고 피팅룸으로 향하는 내 모습 아래에 '평생 가출이나 반항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소심한 40살 여자의 반항'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될 터였다. 남편을 향한 복수(정작 본인은 모르는 복수지만)로 시작했지만, 재촉하는 사람 없이 온전히 누리는 그 피팅의 시간들이 너무나 즐거웠다. 나는 옷을 입어보고 쇼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거 너무나 내 취향이다. 스무 벌 정도 입어보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앞 뒤 옆 확인한 후에 마음에 드는 옷을 구입했다.
' 자 남편한테 복수했으니 이번에는 딸한테도 복수해주겠어. 딸이 제일 지루해하던 게 뭐더라?'
신발_! 아이와 백화점에 올 때마다 옷을 구경하고 입어볼 엄두는 못 내도, 가끔가다가 마음에 드는 신발이 보이면 스윽 신어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엄마 대체 언제 집에 가. 엄마 지루해. 엄마 엄마엄마-'라고 재촉하던 아이가 떠올랐다.
'네 거 살 때만 안 지루하지? 응? 내 것 한 오분 봤다고 난리 치고 말이야.. 그러는 거 아냐... 오늘 스무 켤레는 신어보겠어!!'
이번엔 딸을 향한 복수를 (마찬가지로 정작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신발이 보일 때마다 다 신어보았다. 운동화도 신어보고, 구두도 신어보고, 부츠도 신어보고. 하나같이 다 예쁘다. 꼼꼼하게 거울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재촉하는 이가 없는 쇼핑이 이렇게나 달콤한 것이었나요. 마음에 드는 신발도 구입했다.
이번에는, 그래- 둘 다에게 복수해 주겠어! ( 마찬가지로, 정작 그 둘은 알지도 못하는)
라며 향한 곳은, 지하에 있는 서점이었다. 남편은 책도 싫어하고 서점도 싫어해서 내가 그곳에 가서 책을 구경할 때마다 지루한 티를 팍팍 냈고, 아이는 자기 책 살 때만 가만히 있었다.
' 오늘은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 확인하고 찾아보고 읽어보면서 내 책만 고를 거야! 두고 보라고!'
정작 둘은 내가 이러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그러니 그런 나를 두고 볼 수도 없었지만, 나는 정말 보란 듯이 내 취향의 (그중에서도 둘 다 관심 없을 정말, 내 취향의 최극단점에 있는) 책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한참 시간을 들여 고른 책을 몇 권 구입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다.
드디어, 마라탕을 먹을 순간이 온 것이다.
식당에 가니, 늘 북적이던 훠거 코너가 한가하다. 마라탕을 먹으러 가 놓고선 먹는 데에 더 오래 걸리고 까다롭다 (그러므로 그 두 명과 함께는 더 먹기 힘들다)는 이유로 훠거 코너에 앉았다.
'사실 국물은 같으니까, 둘 다 얼얼하게 맵고 시원하니까 똑같아. 오늘은 혼자서 정말 여유롭고 느긋하게 훠거를 먹어주겠어_!' 또 정작 본인들은 모르는 복수를 다짐하면서 훠거를 주문했다. 혀끝이 얼얼해지는 쾌감을 느끼면서 훠거를 먹다가, 메뉴에서 '칭다오'를 발견했다.
"여기 칭따오 하나 주세요!"라고 주문을 하며 복수의 정점을 찍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 또 딸과 있을 때에는 내가 운전을 해야 해서 여간해서는 외식을 하면서 반주할 기회가 없었다. 곧 시원한 맥주가 나왔다. 얼얼한 혀에 닿는 맥주의 시원함이 이토록 좋은 것이었구나! 일탈 중에 마시는 맥주는, 컵케이크 위에 뿌리는 알록달록한 스프링클스 같은 것.
문득 옆을 보니 옆자리에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혼자 훠거를 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도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나와 비슷한 상황인 걸까. 어쨌거나 당신과 나의 칭다오와 자유에 건배_! 속으로 외치며 맥주를 시원하게 다 비웠다.
백화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거리로 나온 후에도 나의 반항과 복수는 계속되었다. 딸과 남편이 가기 싫어하는, 그러나 내가 늘 가고 싶어 하던 카페로 향했다. 널찍한 노천 자리가 있는 카페였다. 쌀쌀한 기운의 밤이었지만, 그래도 굳이 노천에 앉았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그 둘에게 크게 복수할 수 있으니까.(본인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는 복수라는 것이 문제)
그곳에는 나처럼 느긋한 주말 저녁 밤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있었다. 그들이 눈에는 나도 그런 사람으로 보이겠지. 내가 가출한 여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왕이면 '가출한 40살의 여자'보다는 스스로를 '정체를 숨기고 있는 스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자주 그러한 상상을 하는 사람이다. 혼자서 스파이도 되었다가, 외계인도 되었다가, 외국인도 되었다가 그런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지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현지인들을 관찰하고 있는 스파이인 것이다. 주변을 감지하는 레이더가 몇 배는 더 예민해지고, 그만큼 그 안에 숨어있는 아름다움도 몇 배로 증폭이 된다.
스파이처럼 음흉하고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하다가, '이곳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군!'이라고 생각하며 구입해온 책을 꺼내 읽었다. 그 사이에 핸드폰은 일부러 꺼내보지도 않았는데-9시가 넘어가니 나도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문자라도 보내 놔야지 하고 꺼내보니 '엄마 언제 와?' 딸에게서 문자가 하나 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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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나는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다. 원한다면 혼자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백화점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그날의 자유가 그 토로고 달콤했던 이유는, 내 화와 자유에 정당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린 그 반나절의 시간에 복수라는 서사가 생겨서 더 달콤했다. 어째서 내 자유를 누리는 것에 정당성이 부여되어야 마음이 놓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여기서 그만 하 기로 한다. 복수라는 서사가 생긴 자유는 달콤하다-는 깨달음이 주는 재미를 즐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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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더 늦게까지 버텨버리면, '겨우 그 정도 일 가지고 이렇게 밤늦까지 가출할 일인가?!' 스스로가 황당해할 상황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기분을 느끼며 겨우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집에 들어가니, 공기가 무겁다. 둘 다 하루 종일 내 가출의 무게를 느끼며 답답하게 지냈겠지. 아니면 둘은 티브이 보고 치킨 시켜먹고 마냥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딸은 자기도 삐진 티를 팍팍 내면서도 내 눈치를 보았고,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하지만 다음날, 날씨가 좋으니 공원에 가자는 말에 딸이 바로 '응 가자_!'라고 대답했고, '가기 싫으면 아빠랑 집에 있어도 돼'라고 말하자 '어우 싫어_!'라고 대답한 것을 보아 그다지 좋은 시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저날 뒤로, 나는 산책을 나가고 싶을 때에 둘 다 반응이 별로면 "흥 그러면 나만 나갔다 올 거야!" 짐짓 삐진 척을 하며 혼자 산책을 나간다. 혼자 하는 산책은, 다 같이 하는 산책과 달리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그 자유와 낭만은 나처럼 부지런한 사람의 몫이지! 라며 집안에서 늘어져있는 둘을 은근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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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육아 프로그램에서 육아로 힘든 엄마들의 사연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뭐 아이를 이렇게 키워라 이런 걸 고쳐야 한다 - 이런 말은 다 필요 없다고. 저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마라탕이고 가출이라고 복수라는 서사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이런 의심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가끔 아이와 다툰 후 둘 다 토라져서 각자 방으로 꽝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묘한 안도감이 몰려오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퉈서라도 얻어내고 싶은 잠깐의 자유, 그것에 대한 필요가 누적이 되어 폭발하기 전에 잔잔하게 다투고 터지고 밀어내고 해야 한다. 왜 나는 나의 자유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마음이 놓이는지는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나는 어제도 오늘도 '엄마 엄마!!' 틈만 나면 불러대는 아이에게 '엄마는 바쁘다!!!'며 틈틈이 밀어내고 안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