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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Oct 05. 2020

보건교사 안은영과 무슈 구스타브처럼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구스타브 지배인이 떠올랐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구스타브 지배인이 떠올랐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오로지 쾌감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는 정세랑 작가님의 의도대로, 정말 오랜만에 쾌감을 느끼며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하필이면 비비탄 총과 무지개색 장난감 칼로 젤리 괴물들을 물리치는데, 이 소품들이 소설의 톤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에서 처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 책은 만화 같군. 그것도 코믹 발랄 액션물-이라고 생각할 때 즈음,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귀신이나 악령 같은 것들이 젤리 괴물의 형태로 보이는 안은영은,그로 인해 친구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어두운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에 강선을 만나게 된다. 강선 또한 그의 배경으로 인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둘은 어쩌다가 짝이 되어 나름 조용한 동맹을 맺게 된다. 강선은 안은영이 본다는 젤리 괴물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믿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죽임을 당한 혼들에 의해 얼굴에 상처까지 생긴 안은영을 보다가 강선이 말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제작했다.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뭐라고?"
"장르를 잘못 택했단 말이야.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 달리는 소년 만화여야 했다고. 그랬으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그 꼴로 다치지도 않았을 거고."
"만화가 아니야."
"그렇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한번 그려 봤지."

 강선이 스케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교복을 입은 은영이 5등신 정도 되는 비율로, 치마는 좀 짧아진 채 그려져 있었다. 5등신이 기분 나쁜지 멋대로 치마를 잘라먹은 게 기분이 나쁜지 얼떨떨했다. 그 그림 속 은영의 한 손에는 무지개 깔때기 칼이,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은영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강선이 의자에 걸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정말로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을 꺼냈다. 낡고 흠집이 있는 게 분명 강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인 것 같았다.

"도구를 쓰라고, 멍청아"
"아."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
"하."
"코믹 섹시 발랄? 아무래도 섹시는 무리겠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강선이 은영의 납작한 가슴을 삐딱하게 쳐다보았으므로 은영은 기운을 차리고 지우개를 던졌다.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영은 사실 강선의 설정인 셈이었다.


  안은영의 비비탄 총과 무지개 장난감 칼은 우연히 주어진 소품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비관적으로 볼 수 있는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장치이자, 내 삶의 서사와 톤은 내가 결정한다는 의지인 셈이다. 여기서 구스타브가 떠올랐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총지배인 무슈 구스타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구스타브에게는 젤리 괴물을 보는 이상한 능력도 없고, 비비탄총과 무지개 장난감 칼도 없지만, 대신 그에게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능력이 있고, 늘 애용하는 향수와 시도 때도 없이 읊어대는 시가 있다.

  그는 영화의 중반에-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지만-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친절함을 포기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발견해나가는 재능을 발휘한다. 화려한 호텔에 있어도, 처참한 감옥에 있어도 구스타브는 친절하고 아름답다. 어딜 가도 그는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뜻 사치와 사족처럼 보이는 작은 것들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향수를 뿌리고,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에게는 꼭 보답을 하고 싶어 하고, 제대로 들어주는 이 없어도 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시를 읊고, 적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쫓기는 와중에도) 묵념을 한다.

 

구스타브의 페르소나 같은 향수 L'air Panache

 

 나는, 어린 구스타브를 상상해본다. 영화에서 상세하게 나오진 않지만 이런저런 단서들로 추측해보건대 , 구스타브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보잘것없었을 것이다. 로비보이라는-호텔에서 가장 낮은 직급에 해당하는 일부터 시작하면서, 구스타브는 비참하기도, 외롭기도 했을 터이다. 그에게도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강선 같은 친구가 있었더라면 조금 덜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 너는 캐릭터를 바꿔야 해. 장르도 바꾸고 아름답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라고 말해주는. 어쨌거나 구스타브는 해냈다. 장르를 바꾸는 것을. 아름답고 화려하고 친절하게. 그 과정에서 그는 향수와 시를 자신의 무기로 택했을 것이다. 현실의 추함과 불친절함과 잔인함을 향수와 시로 물리치는 것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 아이와 예전에 자주 가던 공원에 갔다. 길도 막히지 않았고, 주차도 수월했으며, 날씨도 아름다웠다. 인적이 드문 공원의 한구석을 찾아 , 폴딩 체어를 펴고 앉아 각자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들으면서 완벽한 시간을 보냈다. 삶이 이토록 아름다울 때에는 의지라는 것도 필요 없다. 내 삶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그러한 거만함이 고개를 들 즈음에 하늘빛이 수상하게 바뀌더니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지면 어쩌지. 차는 저 멀리 주차되어 있는데..'

 허둥지둥 아이에게 내 숄을 둘러주고 짐을 챙겨서 급하게 주차장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야 하는 짐은 이미 많은데 아이는 자기 가방 하나 들고 있으면서 무겁다고 징징댄다. 넓고 넓은 공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지 주차장이 나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멘탈이라니. 그야말로 유리 멘탈이다.

  

 내 감정하나 내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데 , 내 삶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자만하다니.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과 상황에 대한 짜증이 몰려왔다. 그때 불현듯 '보건교사 안은영'이 떠올랐다. 귀신을 보고 퇴마를 하는 호러 장르의 무서운 캐릭터 안은영이 아닌,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5등신 비율의 코믹 유쾌 캐릭터 안은영. 나와 이름이 한 글자 차이인 안은영. 내 안의 5등신 코믹 캐릭터 안은영이 내게 말했다.

 

"짜증 내지 말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 그리고 도구를 쓰라고!"


  아이가 아까부터 커다란 비눗방울을 불고 싶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르가 바뀌는 기운을 느끼며 뒤에서 쫓아오는 아이에게 말했다.


"그래 -우리 비눗방울을 구하러 가자. 이런 날엔 비눗방울을 불어야 해. 그것도 아주 커다란 비눗방울!"


 방금 전까지 힘들다고 투덜대던 아이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아이들은 장르가 바뀌어도 질문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우리 둘의 발걸음에 힘과 리듬이 생기고, 즐거움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공원 여기저기 구석구석 찾아보지만 비눗방울은 없다. 결국 우린 저 멀리 공원과 연결된 오래된 아파트 상가까지 가서 찾아내고 말았다. 거대 비눗방울을! 어려운 퀘스트를 달성한 게임 속 캐릭터들처럼, 모험심과 자신감이 100 증가하고 그에 따라 에너지도 다시 채워진다.


 기다란 비눗방울 스틱을 앞뒤로 흔들지 않아도, 바람이 알아서 크고 길고 아름다운 비눗방울을 만든다.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날아가고 터진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하기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는 없을 것이다. 아이는 날아가는 비눗방울을 쫓아가서 스틱으로 무찌른다. 진지하고 신나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우리가 미친 사람들처럼 비눗방울을 쫓아가면서 찌르고 웃어댔기 때문이다.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웃다가, 민망하게도 내 청치마의 단추 하나가 똑 떨어졌다. 치마가 흘러내릴 것처럼 위태롭다. 양 어깨에 짐을 잔뜩 매고, 흘러내리는 치마를 한 손으로 잡고 다급하게 주차장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는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고, 그 와중에 비눗방울은 자꾸만 생겨나서 얼굴을 공격하고, 치마는 흘러내리고, 짐도 흘러내리고, 걸어도 걸어도 주차장은 안 보이고,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지는 와중에 , 먹구름이 걷히고 아름다운 노을빛이 퍼졌다.


 구스타브였다면 시를 읊었을 타이밍이다. 내게 그의 시는 없지만, 노래는 있지. 아이와 주차장을 찾아 뛰어가는 와중에 나는 시 대신 노래를 불렀다.


"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와 엄마 드디어 정말 정신이 이상해졌나 봐. 왜 갑자기 그 노래를 불러?"

"왜냐하면, 내 치마가 폴링다운하고 있으니까!"


 절정은 주차장에서 드디어 우리 차를 찾았을 때였다. 우리를 구하러  백마  왕자님처럼, 하얗고 늠름한 자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면서 자동차를 향해 달려갔다. 왕자님!! 저를 구하러 와주셨군요!!




 사실-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와 같은 삶의 사소한 디테일들 외에는 -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삶은 제멋대로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고 불평해도 달라지는 것도 없다. 이런저런 시련들을 겪고, 아이를 키우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사실을 매일매일 절감한다.

 하지만,  삶의 장르와 캐릭터 설정은 내가 결정하고 통제할  있다. 그것은  권리이자  책임이다. 장르를 결정했다면, 진심으로  장르를 추구해야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디테일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비비탄총과 무지개 장난감 총 , 구스타브의 향수와 시-처럼 장르와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디테일. 그러한 디테일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장르라는 큰 틀을 튼튼하고 정밀하게 만들어 준다. 틀이 튼튼해야 그 안에 담길 이야기가 풍부해진다.


 그러니 언뜻,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삶의 작은 사족들을 열심히 챙겨야 한다. 그것들이 언젠가, 나의 삶을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꿀 무기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날의 비눗방울과 노래처럼. 그녀의 비비탄과 무지개 장난감 칼처럼. 그의 향수와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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