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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적당히 희생적이고 상당히 이기적인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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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Sarahn Oct 19. 2020

암탉을 안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자

올여름에, 손에 상처를 제법 크게 입은 적이 있었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전날 밤에 무리해서 작업을 마무리 짓느라,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잠들었는데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부(우리 집 고양이)가 또 낼름이(도마뱀) 케이지위로 올라가 망을 긁는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두부를 다시 내려놓고, 혼도 좀 내고, 다시 잠이 들었나 싶을 즈음에 아침이 와 버렸다.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엄마+작업하는 사람의 아침이란!) 처리하고 다시 누웠지만, 딸아이의 드림렌즈를 빼려고 다시 일어나야 했다.

구구절절 길어졌지만 -한마디로 그날 오전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비몽사몽간에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다가 유리컵을 깼다. 분명 오른손에 들고 있던 유리컵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왼손 손등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흐르는 피와 물기를 닦아내고 잘 살펴보니, 2cm 정도 길이로 찢어지고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제법 깊게 배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프지도 않았고 피도 많이 나지 않아 그대로 자리에 앉아 한참을 상처를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거 병원에 가야 하나.. 하.. 하필이면 오늘 이러다니. 오늘은 아이의 영어 학원에, 방문 수학선생님에, 보드 수업까지 있는 날이라서 병원에 갈 시간이 없는데'

... 같은 미련스러운 생각을 하며 휴지로 지압을 하고 벌어진 상처를 오므려 보았다. 몇 분 후에 상처를 들여다보니 벌어진 부위의 살이 언듯 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오 붙었다-! 그러니 밴드만 붙이고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밴드를 붙이고 세수를 하는데 쩌억 다시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결국 마지못해 여기저기 전화해서 우진이의 스케줄을 조정하고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가까운 병원에 갔다. 대기실에 앉아있으니 그제야 상처부위가 아파오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꿰매어야 하면 어쩌지. 혹시 며칠 손을 못쓰게 되면 어쩌지. 할 것도 많은데.. 쉴 수가 없는데..'

상처부위를 본 의사 선생님이 처음에 꿰매어야 할 것 같다고 했을 때엔 덜컥 겁이 났지만,
다행히 지혈이 잘되고 있으니 테이프를 붙이고 며칠 조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파상풍 주사도 맞고.

-

병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이

"엄마는 진짜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상처가 나면 엉엉 울 거 같은데, 엄마는 어떻게 울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아?"라고 물어봤다.

글쎄. 왜 난 안 울었을까. 그만큼 안 아파서이기도 하고 그렇게 울어봤자 해결되는 것이 없다, 나 말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였겠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나니 고통을 온전히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문득, 한 번쯤은 다치거나 아플 때 뒷일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 고통에 흠뻑 빠져 엉엉 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시원할 거 같다. 그러고 보면 그것은 아이들의 특권인 것 같다. 신나면 웃고, 아프면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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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난 상처가 제법 깊었기에, 꿰매진 않아도 이틀에 한 번은 병원에 가서 상처를 확인하고 드레싱을 해야 했다. 병원을 두 번째 방문한 날에는, 내 손을 처음 치료해줬던 원장 선생님(남자)이 바쁘셔서 부원장 선생님(여자)에게 진료를 받았다. 손등에 붙인 거즈와 듀오덤을 떼어내자마자 선생님이 한숨을 쉬었다.

" 상처부위가 진물도 많고 상태가 안 좋네요. 혹시 이런 상태로 집안일 다 하셨어요?"

사실 처음 치료를 받을 때 원장 선생님이 너무나 덤덤하게 " 네 , 듀오덤을 붙였으니 평상시에 하시던 대로 생활하시면 돼요. 설거지나 샤워 뭐 이런 거 다 괜찮아요"라고 했었다. 사실 좀 못 미더워서 여러 번 "정말 그냥 물 닿고 해도 돼요?"라고 물어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듀오덤 붙이고 방수 테이프 붙여서 괜찮아요." 같은 무심한 대답만 돌아왔다.

" 네.. 원장쌤이 그래도 된다고 하셔서.. 좀 조심하긴 했는데.."

"하.. 남자가 여자가 집에서 보통 얼마나 일상적으로 물을 사용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남자들은 손 씻고 세수하고 샤워하고, 하루에 물을 쓰는 빈도가 많지 않은데, 여자들은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 씻기고 요리하고 다 해야 하잖아요. 손에 물이 닿는 정도가 남자들 몇 배인데, 그러면 아무리 방수테이프 붙이고 처치를 했다고 해도 그 습기 다 스며들어요. 오늘은 제가 일부러 더 티 나게 붕대도 많이 감아 드릴 테니 남편분한테도 보여드리고 엄살도 부리고 그러세요."

실 테이프 두어 개 붙이고 손등을 다 덮을 정도로 크게 듀오덤을 붙이고 거즈를 붙여주었던 원장과 달리, 부원장 선생님은 실 테이프도 가지런하게 네 개, 듀오덤은 손을 움직이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그것도 손등 모양에 맞춰 곡선으로 잘라서 붙여주었다. 그 위에 방수 테이프를 꼼꼼히 붙이고 접착 붕대를 꼼꼼하게 감았다. 내 손을 소중히 다루는 그녀의 태도에 주책맞게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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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손 없이는 내가 아니다. 그 정도로 내 손에 많은 것을 의지한다. 내 손으로 많은 것들을 만들고 (내 밥줄이기도 하고_!) 글을 쓰고, 아이와 고양이와 도마뱀을 돌본다. '금손'이라고 남들이 칭찬해 줄 때마다, 정작 나는 한 번도 내 손을 귀하게 여기거나 칭찬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이 일깨워준 후에야 나의 불공평했던 처사를 깨닫는다. 뒤늦게 아찔함이 몰려왔다. 조금만 깊게 찔렸다면 신경을 다쳤을 터였다. 그러면 손을 제대로 쓰지 못했겠지.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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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은 타이밍에 타인의 도움이 불쑥 나를 일으켜 세워줄 때가 있다. 남자 여자 구분 없이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남자가 보태주는 힘보다 여자가 여자에게 보태주는 힘이 몇 배로 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공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적도 생긱고 아군도 생기고 그러는 거지- 그러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자. 진정으로 여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같은 여자이다. 여돕여.

결국 손의 상처가 다 낫기까지 2주 이상 걸렸고, 병원도 자주 방문해야 했고, 그럼에도 손등에는 제법 큰 흉이 남았지만 그 사건은 내게 두고두고 떠올려보고픈 올해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 후로 뭔가 크게 달라졌냐면, 그건 아니지만, 적어도 핸드크림은 꼭 챙겨 바른다. 심지어 손톱 영양제도 바른다. 그리고 여적여의 필터가 아닌, 여돕여의 필터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딸에게 많은 이야기(또는 잔소리)를 해준다. 여자는 강하고 멋진 존재.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 다른 여성들을 도울 수 있게 훌륭한 사람이 되자고.

하지만 사실은 저때를 떠올리면, 누군가의 품에 소중하게 안겨있던 암탉이 먼저 떠오른다.

손을 다치고 드레싱하러 두번째로 병원을 방문 하던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사이에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품에 갈색의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여자였다. 멀리서 봐도 동물처럼 보이는 그 갈색 생명체는 강아지인가 고양이인가-궁금함에 집중하여 그 품을 보고 있었다.

바로 내 차 앞까지 다가와서야 그게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닌 암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나이 또래의 여자가, 암탉을 세상 소중한 보물인 양 양팔로 아기처럼 안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장면을 보는 순간 탱탱하던 마음의 끈이 '탁'하고 풀리면서 느슨해졌다. '이 장면은 이따가 꼭 딸에게 말해줘야지'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

하루 종일 동동 거리고 이리저리 사고 치고 다니고 화내고 자책하고, 그러다가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도 했다가, 왜 모든 일이 다 내 마음과 반대로 되나, 세상 참 빠듯하다. 싶어서 허무해지기도 하고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딱딱 진행되면 좋겠다 싶다가도,

그래도 대낮에 시골도 아닌 도시의 큰 도로 횡단보도를 암탉을 안고 지나가는 여자처럼, 현실이 자주 어긋나고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웃긴 일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운 사건사고들이 생길 때마다 이 세상이 암탉을 안고 횡단보도를 건너는구나 라고 생각해야지. 그러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유리컵이 깨지면서 왼쪽 손등에 상처를 남긴 것 같은 황당한 일들도 횡단보도를 건너는 암탉이 되어버리겠지.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덕분에 기대하지 않았던 깨달음을 얻어 가는 것은 자신의 몫이고, 그 덕분에 웃을 수 있는 것은 삶이 주는 덤이라고 생각하면 못 이겨낼 황당함 같은 것은 없을 것도 같다.

그나저나. 그 여자는 그 암탉을 안고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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