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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만 제이 Sep 23. 2020

알고 보면 낭만적이지 않은 단어 “낭만”

“낭만” 혹은 "로맨스"에 대하여...

하기사 지가 하믄 로맨스고 남이 하믄 스캔달이라 카기도 하고, 또 남한테 안 들키면 로맨스고 들키믄 스캔달이라 카는 말도 있습디더마는 참말로 우리는 달라예. (이문열, '구로 아리랑')


누구나 모국어는 숨을 쉬듯이 사용한다.

심지어, 자면서 무의식 중에 하는 잠꼬대도 정확한 문법으로 말할 수 있다.


"야~ 이 나쁜 자식아! 니가 먼저 바람났잖아! 흠냐흠냐... 엄마 밥줘~ 흠냐흠냐..."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자음동화" "두음법칙"... 뭐 이 정도 문법을 배운 것 같지만, 평소에 말하거나 쓸 때, 한국어 문법을 의식하면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국어 (Mother Tongue, 엄마 말)"는 말 그대로 "엄마"처럼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새롭고 신기한 사람은 그 배경이나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길 수 있다.


내가 처음 동경에 갔었던 90년대 중반, 일본 친구들이 어디 가고 싶냐 해서, "동경타워"라고 했더니, 화들짝 놀라며, 그 철탑 위에 뭐하러 가려하느냐, 자기들은 가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헉, 동경 살면서 동경타워 가본 적도 없고, 그게 어떤 역사가 있는지도 몰라?"


그들에게는 눈 떠서 거리로 나가면 그냥 의례 보이는 시뻘건 철탑일 뿐인 것이다. 외국인에게나 관광명소지...


우리가 쓰는 한국어도 어쩌면 일본인들의 동경타워 같은 존재 일지도 모른다. 숨 쉬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매일매일을 쓰고 읽으면서, 그 기원이 뭔지 각각의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냥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 같은 존재니까. 숨 쉴 때 누가 생각하고 쉬나...


나는 20세기말 중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영어 공부했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어쩌다 일본어를 익혔다 (공부했다고 하기는 민망해서 익혔다고 표현한다). "우리 엄마 말(모국어)"이 아닌 "남의 엄마 말(외국어)"을 알고 나니, 왜 그렇게 쓰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 쉬듯 자연스러운 말이 아니니까... 문법부터 배웠으니까...


그러다 일본에서 살 때 우연히 "浪漫"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영화 포스터를 본 적이 있는데,


"어라? 이거 한국어로 읽으면 "랑만"이네?"


라고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유레카~"의 기분으로다가...

浪漫을 일본어로 읽으면, "로오망"이 된다. 한국어로 읽으면 "랑만"이지만,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밑줄 그으며 공부한 "두음법칙"의 정의에 따라, "낭만" 이 되는 것이다. "락성대"가 "낙성대"로, "리소룡" 이 "이소룡" 이 되는 것처럼...

이 포스터를 본 건 아닌데, 이런 이미지였다... 출처: https://kandora-fan.com/raro/kimsao/kimsao13-14/


어쩌다, 영어의 "Romance"가 일본어의 "浪漫(로망)" 이 됐다가, 한국어의 "낭만"으로 정착했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아주 예전에 일제시대와 한국전을 모두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시대에 맞춰 바꿔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기구한 인생을 그린 "명자, 아끼꼬, 쏘냐"라는 영화 제목이 떠 올랐다.    


그런데, 구글 선생님한테 어쩌다 "로맨스"가 "로오망"이 됐다가, "낭만"까지 왔는지 여쭤보니, 실은 영어로 "로맨스"가 되기 이전부터, 살짜기 슬픈 과거가 있는 여인이었다... 아니, 단어였다...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중세 유럽에서 귀족과 지식인 층은 고급언어인 "라틴어"를 썼다. 그래서, 철학이나 사상, 종교 등의 서적은 모두 라틴어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서민들은 철학이나 사상 등의 지식에 접근할 수도 없고, 종교적인 메시지도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틴어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을 나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내용 아닌가? 그렇다, 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실 때 있었던 현상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당시 기득권 세력들은 서민들까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들면, 한자라는 도구로 지금껏 자기네들의 세력기반을 유지해 왔던 사회적 틀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연일 촛불집회를 단행한 것이다...  


암튼, 조선에서 다시 중세 유럽으로 돌아가서...

역시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남녀상열지사", 즉 "성과 사랑"인 것이다. 중세 유럽 서민들은 고급언어인 "라틴어"를 하지 못하니, 라틴어 사투리 격인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으로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기사들의 영웅담 등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천박한 말로 천박한 내용을 적는 "소설"을 "Romanz (로마 사투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언문"인 것이다.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썰"이 많은데, 대체로 이런 맥락이다. 조승연 작가가 비정상회담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


https://youtu.be/Qe0IkK8udJA

조승연 작가가 설명하는 로맨스의 어원


자 "Romanz"가 영어로 넘어오면서 "Romance"가 된 건 알겠는데, 어쩌다가 "浪漫 (로오망)" 이 됐을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어의 "当て字(아테지)라는 계념을 이해해야 한다. 当てる 는 맞추다는 뜻인데, 아테지는 우리말로 하면, "끼워 맞춘 글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현대 일본에서는 외래어를 대부분 카타카나로 쓰지만, 서구 문물을 처음 받아들이던 시절의 일본인들은 어떻게든 발음이 비슷한 한자어에 끼워 맞추려 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지금이야 "フランス(후랑스)"라고 쓰지만, 예전에는 "仏蘭西"라고 썼다.

"어라? 우리 할머니가 맨날 불란서라 했는데?"라는 분들도 분명 있으리라... 그렇다... 일본인이 만든 아테지를 우리식 한자발음으로 읽었던 것이다.

"커피"는 지금이야 "コーヒー(코-히-)"라고 쓰지만, 예전에는 "珈琲"라고 썼다고 한다. "가배"라고 들어본 분 계시지 않나? 그렇다면 그대도 좀 연식이 되시는 분 일지도...

일본 구글 선생님께 여쭤보니, 커피 열매가 여자들이 사용하는, 구슬로 엮은 머리장식을 닮았다고 해서, 珈가(머리장식), 琲배(구슬묶음)라고 지었다고 한다.

여자 머리장식을 보고 어찌 커피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출처: https://perfect-coffee.info/coffee-origin

나는 중국어를 잘 모르니, 중국어에도 "아테지"라는 계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자 발음과 비슷한 뜻을 조합하여 외래어를 표기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리라 본다. 코카콜라는 "입에 맞아 즐겁다"라는 可口可樂(커코우컬러)라고 쓴다고 하니 문법적으로 뭐라 부르는 지는 몰라도, 중국식 "아테지"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한자를 쓰지 않는 한국어에는 "아테지"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건 최근들어 "아테지" 비스무리 한 것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때,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스코필드"가 "석호필"이 되고, 많은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일본 AV계의 황제 "시미켄"의 한국어 이름이 "심익현" 이란다. 예전에는 찌질하고 사회 부적응자 이미지가 강했던, 일본의 오타쿠가 한국에 넘어와서, 아주 상량하고 부드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덕후~"


나는 왜 글만 쓰면 삼천포행인가...

아무튼, 중세 로마 사투리 "Romanz"가 영어의 "Romance"가 되고, 일본어로 넘어오면서 억지로 끼워 맞춘 "浪漫(로우망)"이라는 한자어가 탄생되었는데... 이걸 처음 생각한 사람의 어원에 대해서는 구글 선생님도 잘 모르시는 것 같더라... 그래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펴 봤는데...


浪(ろう, 로우)는 "큰 파도"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랑"으로 읽히며, 랑이 쓰이는 표현은 "방랑" "풍랑" "랑랑 18세" 외 기타 등등에 많이 쓰인다.

漫(まん, 망)은 "흐트러진 모양새" "깊은 생각이 없는" 뭐 이런 의미로 쓰인다는데, 우리말로는 "만"으로 읽히고, "산만" "방만" "만화" "만평" 외 기타 등등에 많이 쓰인다.


그럼 뭘까... 로맨스를 처음 접한 일본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런 한자어를 만들었을까?


"사랑을 하면, 큰 파도처럼 사람은 흐트러진다?"

아니면,

"별생각 없이 한 사랑이 큰 파도가 되어 인생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한자를 붙였을까...


우리는 일제 잔재의 청산을 위해, 이미 생활 속 일본어를 많이 아름다운 한국어로 바꾸어 쓰고 있다.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쓰메끼리" "와리바시" "나와바리" "겐세이"... 이런 단어 안 들어 본 지가 무척 오래된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근대에 들어 서구문물을 받아들일 때 만들었던 일본식 한자어들은 우리 언어에 너무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 우리가 그걸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수가 너무 많아, 그걸 다 뽑아버리면 아마 한국어 언어체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대학교" "국회" "식사" "대통령" "공화국"... 이런 단어들을 다 내일부터 쓰지 말자고 하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당장 일본식 한자어를 그만 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면에 있는 한자의 의미는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한자를 포기한 한국어로는 사실 단어의 이면에 담긴 뜻까지 헤아리기가 힘들어진 것 같아 아쉽다.


낭만적인 우리의 언어생활을 위하여, 파도 같이 길지만, 별 깊은 생각없는, 흐트러진 글을 주저리주저리 한번 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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