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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만 제이 Oct 21. 2020

“우연”의 다른 이름은 “기회”이다!

내가 “운칠기삼”을 좋아하는 이유...


"Opportunity dances with those already on the dance floor."

기회는 이미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과 춤을 춘다. (H. Jackson Brown, Jr. 미국 작가)


"기회의 신" 카이로스와 오카시오


그리스 신화에서 "기회의 신"은 제우스의 막내아들인 "카이로스(Caerus)"라고 한다.

카이로스는 앞머리는 길지만, 뒤통수는 대머리에,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기회"가 다가올 때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지만, 일단 지나간 다음에는 잡을 수 없도록 뒤통수는 대머리이며, 더 빨리 달아 날 수 있도록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고 한다.


역시 인간에게 더 친숙해지려면 "남신"보다 "여신"이 더 유리한 것일까?

"카이로스"는 여신 버전도 있는데, 이름이 "오카시오 (Occsio)"이다. "기회"라는 의미의 영어단어인 "Occasion"의 어원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Occasionally"라는 영어 부사의 의미는 "가끔, 간혹"이라는 뜻인데, "기회"는 "가끔" 혹은 "간혹" 찾아온다는 의미일까?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혹은 " 간혹", "카이로스" 혹은 "오카시오"가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인간에게 잘 보이려고 미용실 가서 이쁘게 파마까지 했다는 그 치렁치렁한 앞머리 조차도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이전에 "Connecting the dots..."라는 글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스티브 잡스 형님의 스탠퍼드 대학 연설문에도, 인생의 중요한 점들은 앞으로는 이어갈 수 없고, 지나 온 점들만 이을 수 있다고 한 것 같다.  

https://brunch.co.kr/@jay0509/5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미래를 향해 인생의 점들을 이어 갈 수는 없다. 오직 지나 온 날들의 점들을 이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의 점들이 언젠가 미래에 이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베짱이든, 운명이든, 인생이든, 인연이든 뭐든 믿어야 한다.


잡스 형님은 "인생의 점(Dots)"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이 인생의 점을 "변곡점"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변곡점"의 사전적 의미는 "곡선이 오목에서 볼록으로, 혹은 볼록에서 오목으로 바뀌는 지점"이라고 한다. 결국,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나의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 보면, 내 앞으로 "카이로스" 혹은 "오카시오"가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고, 그나마 내가 그들의 앞머리를 움켜쥔 몇 안 되는 순간인 "변곡점"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 온 것 같다.

 

내 인생을 스쳐 지나간 "카이로스"와 "오카시오", 그리고 그들의 앞머리를 나도 모르게 낚아 채 인생의 방향이 바뀐 몇 가지 "변곡점"들을 우선 소개한다.




1. 우연히 "VIP"의 의미 하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영어 덕후가 되다.


지금이야 영어 조기교육이 당연한 세상이 되어,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가 영어태교를 시작하니, 요즘 학생들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내 또래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I am a boy." "You are a girl."을 처음으로 배운 세대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예문이 많았다. 눈으로 보면, 남자애 인지 여자애 인지 모르기가 오히려 힘들 텐데, 자기 입으로 앞에 있는 사람한테 "나는 소년이야. (소녀가 아니란 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평생 있을까 싶은데 말이다. 일제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불과 30여 년 전은 그랬었다.


중학교 입학식 1주일 전부터, 갑자기 어머님이 뭐가 답답해졌는지, 피아노 수업을 마치신 후에 밤마다 나에게 영어 기초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스파르타식 긴급 영어 특훈은 일주일 내내 매일 밤 이어졌고, 나는 G(지)와 O(오)가 붙으면, "지오"가 아니고, "고"로 발음한다, T와 H가 같이 붙어 있으면 (Th), 혀를 살짝 깨물듯 "쓰" 나 "드"로 발음한다... 등등... 도대체 코 크고, 피부 허어연 사람들은 왜 혀까지 물어가며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너무 궁금할 정도로, 희한한 글자와 희한한 발음을 밤마다 졸리는 눈을 비비며 외워야만 했다.


그렇게 영어 1주일 스파르타 캠프는 끝나고, 드디어 생애 첫 영어수업.

아주 우연한 기회로 나는 한순간에 영어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은 작지만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선생님 : "VIP"의 약자가 뭔지 아는 사람?

반 친구들: (모두 선생님의 눈을 피하며) "... "

나 : (손을 번쩍 들고) "Very Important Person 이요."

반 친구들: "자는 뭐꼬? 우에 저런 걸 다 아노?" (번역: 제는 뭐야? 어떻게 저런 걸 다 알지?)


이날, VIP 외에 "전자오락이 영어로 뭔지 아는 사람" 등의 질문에 나 혼자 손들고 답을 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1주일 영어 특훈 중에 어머님이 희한하게 VIP, Video Game 등의 단어도 몇 개 알려줬는데, 왠갖 짜증 속에 "엄마, 내 이제 잘란다. 이거 외아가 뭐하노. 시험에 안 나올끼다. VERY IMPORTANT PERSON!! 됐제!? 내 잔데이!!" 하면서 잠결에 화내면서 읽었던 그 몇 개의 단어가 첫 영어시간의 선생님 질문으로 나온 거다.


이 작은 해프닝이 이른바 나를 영어 덕후로 만들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영어 선생님이 교사 부임 첫해인 젊은 여선생님이었다는 것도 내 영어사랑의 한 (불순한) 동기였는지 모르겠다. 새벽에 굿모닝 팝스를 듣기 시작했고, 동네 형이 쓰다가 대학 진학으로 버릴 거라는 "윤선생 영어" 교재와 테이프를 모두 물려받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나중에는 중학생 주재에 어머님이 대학시절 보시던, TOEFL 교재까지 사전을 뒤지며 해석하기까지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97 무주 전주 유니버시아드 대회 영어 통역", "2000 시드니 올림픽 삼성 애니콜 학생기자", "히로시마 대학 교환학생", 히토츠바시 대학 MBA (경영학 석사) 진학 시 "일본 문부성 연구장학생" 등등, 거의 모든 내 인생의 변곡점에는 영어 필기시험 혹은 면접이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중학교 1학년 첫 영어수업에서 당시 몇 개 알지도 못하는 영어 단어 중에 때마침 선생님이 VIP 약자를 물어본 "우연"이 시작이었지만, 그걸 그냥 집에 가서 엄마에게 자랑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인생의 "기회"로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운명적인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2. 옆 부서 퇴사자의 인사말 한마디에 일본 MBA 유학을 결심하다.

   

2002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이었던 로레알 코리아에 입사가 결정된 후에, 지금의 와이프와 구청 가서 혼인신고만 하고, 첫 신혼집을 서울특별시 성동구 용답동의 30만 원짜리 월세로 시작했다. 처가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이라 와이프도 곱게 곱게 자란 귀한 딸이었는데, 부모님께는 일절 지원을 받고 싶지 않다는 나의 똥고집을 와이프가 너그러이(?) 이해해 주어서(몇 년 후에야 처가에서는 당시 많이 섭섭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이프가 모아둔 몇 백만 원만 들고 나 먼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서, 혼자 낯선 서울 지하철 노선표 보고 직장이 있던 삼성동까지의 교통만 생각한 채 찍은 곳이 용답동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 30만 원의 방을 구했지만, 입주 후에야 알았다. 천장에는 밤낮으로 쥐들이 운동회 하는 소리 "다다다다다~" 가 들리고, 어디서 나오는지 바퀴벌레도 끝도 없이 나오고, 옆집과의 담과 담 사이에서는 밤마다 아기 고양이들이 울어대는 방이었다는 것을...

아직도 기억나는데, 나중에 서울로 올라온 와이프에게 이런 곳에서 신혼을 시작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했더니, 와이프의 한 마디...


"괜찮아. 월 30만 원짜리 디즈니랜드 왔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천장에 미키마우스가 사네~" (눈물이 찔끔~ 여보야, 충성할께요~)


우여곡절 끝에 6개월 만에 로레알 코리아를 퇴사하고, LG로 이직, 그 후로 와이프와 알뜰하게 모으고 모아서, 2006년 결혼 4년 만에 남현동 관악산 입구에 있는 신축빌라에 전세로 입주했을 때의 그 말로 표현 못하는 행복감이란... 당시, 회사생활에도 상당히 만족하고 있어서, 나는 매일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나의 마음의 호수에 잔잔한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회사는 LG Philips LCD (현재는 LG Display)라는 회사로, 평면 디스플레이 시장이 급성장하고, PDP(플라스마 디스플레이)와 LCD(액정 디스플레이)중 생산효율이 좋았던 LCD로 시장이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회사가 엄청난 속도로 급성장 중이었다.


인력부족으로 LG 그룹사에서 사원을 받기도 하고, 외부에서 신규 채용하기도 하면서 인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6년 경에 새로 입사한 해외영업 인원의 상당수가 미국 MBA 출신이었다. 영업총괄 책임이셨던 부사장님이 MBA 출신자를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정말 주변에 MBA 출신자가 넘쳐 났다.

MBA 출신 입사자들은 전자업계에 대한 경험은 없었지만, MBA 출신자들은 하나 둘 나의 상사로 입사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당시 MBA가 대단한 벼슬인 줄 알았다. 그보다, 이 시대에는 이미 학부 출신만으로 자신의 경쟁력을 쌓아갈 수 없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대학시절 뭐든 남의 돈으로 "스펙 쌓기"를 해 왔던 나로서는, 공짜로 MBA 취득하는 방법을 여러모로 궁리해 봤지만, 딱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비싸기로 유명한 MBA 학비에 생활비까지 하면, 2년 동안 2~3억은 든다고 하니, 정말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미국 MBA를 최저가로 온라인으로 이수할 수 있다는 책을 구입해서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부서인 TV 영업팀의 한 사원이, 다른 부서 부장님과 내 책상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하필 내 책상 옆이야?!’ 하고 좀 짜증이 났다.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대화 내용이 이랬다.

사원: "저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부장: "왜? 퇴사하고 어디 가는데?"

사원: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의 MBA(Hitotsubashi ICS)에 입학하게 됐어요."

부장: "MBA 비싸지 않니?"

사원: 국립대학이라 한해 등록금이 550만 원 정도밖에 안 해요.

          세계에서 가장 싼 MBA지요."


갑자기 "그림의 떡"이었던, MBA에서 진짜로 달콤한 송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미국 MBA만 생각했지, 일본 해외영업이었던 내가 일본 MBA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날 오후, 퇴사 직전의 그 사원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짜고짜 LG 트윈타워 지하의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벙찐 표정으로 그러자고 한 그 사원... 무슨 길거리 헌팅도 아니고...

지금까지 눈인사만 하던 그 사원에게 히토츠바시 대학 MBA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집에 가서 와이프에게 히토츠바시 대학 MBA 가고 싶다고 바로 말했다. 당연히 그런 돈이 어디 있냐는 반응이다... 그런데, 히로시마 대학에서 알게 된 "문부성 연구장학생"이 번뜩 떠 올랐다.


나: "문부성 연구장학생으로 가면 되지!"

와이프: "문부성 연구장학생은 아무나 하나?"


"일본 문부성 연구장학생"은 석사, 박사과정까지 최장 7년간 학비 면제에 생활비로 매달 15만 엔 (약 150만 원)을 지원받는 일본 정부의 장학사업이다. 일본어와 영어로 된 1차 시험, 그 후의 연구계획서 심사 후에, 면접을 거쳐 후보로 결정되면, 가고자 하는 학교의 입학허가를 기한내에 받아야 최종 합격하는 길고 험란한 과정인데, 히토츠바시 ICS는 MBA이기 때문에 GMAT 도 전형에 포함되어 있었다.

낮에는 회사 업무로 정신없었지만, 저녁에 퇴근하면, 연구계획서 작성에, GMAT 학원을 다시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 손 놓았던 수학 공부에 매진했다... 정말 2007년은 정신없는 한 해였다. 그놈의 수학은 평생 나를 괴롭힌다. 결국 ICS MBA도 GMAT 성적이 낮아서, 보류 상태가 지속되다가, 문부성 전형의 데드라인 가까이 돼서야 최종적으로 합격 연락을 받았다. 참, 세상에 공짜가 없다... 공짜 유학이지만, 정말 몸고생 마음고생 많았다...


그 옆 부서 퇴사자는 나의 대학원 2년 선배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지만,

'만약 그분이 내 데스크 옆에서 다른 부서 부장님께 퇴직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히토츠바시 ICS 이야기를 안 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면, 참 우연이란 게 올 때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아주 조용히 사뿐사뿐 찾아오는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절실히 MBA 유학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시끄러운 잡담으로 흘리지 않고, 나의 진로에 엮을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한 번도 대화한 적 없는 퇴사 직전의 사원에게 커피 한잔을 권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냥 지나가는 "우연"으로 끝났을 이야기이다.


3. "마사토"와 "야스시"의 매력(?)에 끌려 종합상사 업계에 발을 들이다...

 

히토쯔바시 대학 대학원 국제전략 연구과 (일명 Hitotsubashi ICS)에는 약 55명의 한 클래스로만 구성된 작은 MBA지만, 정말 대단한 연구진과 교육 시스템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학생 구성은 일본인이 7명 정도에 나머지는 한국, 미국, 유럽, 심지어 몽골까지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지만, 가장 많은 인구비율은 미얀마,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 출신들이었다.


그중, 내게 유독 눈에 띄는 친구들이 둘 있었는데, "마사토"와 "야스시"였다.

이 둘은 학점도 클래스 최상이었지만, 놀 때는 누구보다 잘 놀고, 그 누구보다 여러 친구들의 일본 생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여러 국적의 정서도 사고도 모두 다른 클래스 친구들을 잘 조율해서, 클래스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이었다.

그런데,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미쯔이 물산"의 현역 사원으로, 마사토는 회사 지원으로, 야스시는 자비로 휴직하고 온 친구였다.


이렇게 대단한 친구들이 다니는 미쯔이 물산이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서, 마사토에게 미쯔이 물산과 종합상사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더니, 마사토가 비어 있는 교실로 바로 가자고 한다. 그 자리에서 2시간이 넘게 화이트보드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미쯔이 물산과 종합상사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 날이후, 나는 더욱더 미쯔이 물산이 궁금해져서, 직접 그 회사 안에서 체험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대학원 내의 "Placement Office (취업지원실)"에 찾아가 미쯔이 물산에 인턴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담당 직원분이 좀 당황해하시며 "미쯔이 물산은 창립 후 130년이 넘는 회사지만, 인턴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안다"라고 난색을 표하셨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인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며칠 후 취업지원실에서 잠시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 담당 직원분의 친구가 미쯔이 물산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 부장인데, 내 이야기를 듣고는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하니 차나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 후로, 그 부장님과 면담 후, 인사부 면담 등을 통해, (정식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나) 미쯔이 물산 135년 역사에 최초로 "인턴"이라는 이상한 존재가 부동산 REIT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Asset Management 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의 이야기는 "05. 종합상사맨, 3,650일의 추억..."에 소개한 대로, 오늘날의 스미토모 상사까지 이어진다.

  https://brunch.co.kr/@jay0509/14


나중에 스미토모에 입사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미토모 관계자가 내게 면접을 보자고 제안한 이유는, 내가 당시 일본 기업을 하나 둘 재치고 성장하던 한국 대기업들이 일본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고 있던 때라, 한국 대기업의 하나인 LG 출신이라는 점과, 미쯔이 물산의 "인턴"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궁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클래스 전원이 "마사토"와 "야스시"를 좋아하고 많이 의지 했지만, 그들에게 미쯔이 물산과 종합상사에 대해 물어본 친구는 나 밖에 없었고, 그 길로 취업지원실에 가서 "미쯔이 물산 인턴 할래요~"라고 한 친구도 나 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우연한 순간, 혹은 "변곡점"들은 훨씬 더 많지만, 내 이야기는 그만하고, 뉴튼과 마윈의 이야기를 한번 해 보자.


뉴튼이 우연히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한다. 뉴튼 본인이 했던, 후대 사람들이 했던, 어린 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일 것이라는데 500원 건다!


중요한 것은 수백만 년의 인류 역사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본 건 분명 뉴튼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에덴동산의 이브도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아담에게 건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한 뉴튼에게는 "세상의 물건들이 어떤 이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무던히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의 눈에는 별 것도 아닌, 사과 하나에서 영감을 얻었으리라.  


세계 최대의 인터넷 기업중 하나인 알리바바의 창시자 마윈은, 영어 덕후로 영어강사를 하던 1995년에 미국 범죄조직에 사기를 당한 항저우 시정부의 의뢰로 미국 현지 시찰 출장을 갔다고 한다. 미국 현지에서 조직폭력단에 감금될 위기에 처한 마윈은 "카지노나 해라"라는 조직폭력단의 말에 조직폭력단의 감시하에 처음 한 카지노에서 25달러를 베팅해 600달러를 벌고, 조직폭력배가 한눈을 파는 틈을 타 호텔에 둔 모든 짐과 귀국 항공권을 버린 채로, 카지노에서 딴 돈과 여권만 들고 시애틀에 있는 친구에게 중국으로 갈 항공권을 살 돈을 빌리러 갔다.

친구 가게에서 처음으로 인터넷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Beer (맥주)"라는 단어를 검색하니, 미국, 독일, 일본 등 수도 없는 나라의 맥주들은 검색이 되는데, 중국 맥주는 하나도 검색이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 중국에서는 아직 아무도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한 마윈은 중국으로 돌아와 인터넷 사업의 선구자가 된다. 이것도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 이긴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저명인의 이야기이니 일단 믿어주기로 하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항저우 시정부가 사기 투자자의 시찰에 하필 왜 영어 강사였던 마윈을 골라 맡겼으며, 조직폭력배에 감금될 위기에서 하필 왜 조직폭력배들이 마윈에게 카지노를 권했으며, 귀국 항공권을 살 돈을 빌리러 간 친구 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회포를 풀지 않고 하필 왜 인터넷을 검색했는지는 단순히 "우연"이 이어졌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맥주"를 검색해서 "인터넷 사업을 해야겠다"를 생각해 낸 것은 마윈에게 작은 "우연"을 어마어마한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10대 시절에는 (라떼는 말야~가 생각나는 표현이네...), 무조건 "하면 된다"만 가슴에 품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살았다. 40대가 된 지금, 나는 "하면 된다"를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면 된다"에는 주어도(누가), 목적어도(무엇을 하면), 보어도(무엇이 된다) 없는 아주 요상하고 추상적인 문장이다. 사람마다 재능도 다르고, 목적의식도, 취향도 각각 다른데, 이를 모두 무시한 "하면 된다"만 주입하는 교육이나 정책은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상사의 명령에 자신의 의견이나 목적을 개입해서는 안 되는 군대나 전쟁터에서나 통하는 말이 아닐까? 속된 말로 "까라면 까라..." 도 비슷한 표현인 듯...


성인이 되고 나서 좋아하게 된 단어는 "운칠기삼 (運七技三)"이다.

인생의 어떤 일에 있어 운이 70%, 나머지 30%는 재주와 노력이 성패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따라야 된다는 허망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우연(운, 運)이 우리 앞을 지나간다. 그 우연을 기회로 살릴 것인가 그냥 스쳐가는 우연으로 보낼 것인가는 그 사람의 재주와 노력(기, 技)에 달려 있다."


기삼(技三)도 무턱대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고 싶은 일과,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운칠(運七)을 기회로 살릴 수 있는 것 같다.


일본어에는 "안테나를 세워서 ~ 를 한다...(アンテナ を張って~をする)"라는 표현이 있는데, 정보가 중요한 종합상사에서는 정말 빈번히 사용하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전파들이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전파를 읽을 수가 없다. 안테나라는 장치를 사용해야, 수신장치의 주파수와 맞는 전파만 읽어 들여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소리나 그림 등의 정보로 변환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파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연" 혹은 "운"이라면, 안테나는 자신의 주파수에 맞는 전파만 받아들여 가치 있는 정보, 즉 "기회"로 만드는 도구가 아닐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기회의 신 "카에로스와 오카시오"의 앞머리를 보는 눈이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기회를 캣치 해 낼 수 있는 안테나가 되어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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