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지가 아닌 링을 택한 이유는?
심판이 파이트 선언을 하고 종이 울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9번째 싸움을 하고 있다. 살 빼려고 나간 아마추어 시합을 시작으로 시간이 벌써 2년 가까이 흘렀다. 경기가 시작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상대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나를 향해 돌진한다. 저번 시합이 끝나고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발을 붙이고 맞불을 놓는다. 치열하게 치고 박는다.
아무리 때리고 또 때려도 쓰러질 듯 말 듯 쓰러지지 않는 상대와 누가 더 단단한지 겨루는 시간이 끝났다. 심판은 내가 아닌 상대 선수의 손을 든다. 1라운드 마지막에 간을 맞고 다운당한 게 판정에 크게 작용했나 보다. 아쉬울 새도 없이 상대와 포옹을 하고 링을 내려온다. 몸이 너무 힘들다. 걸을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아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링 아래로 내려온다. 내리쬐는 백열등을 느끼며 대자로 뻗은 채 눈을 감는다. 눈을 뜰 힘이 남지 않았다. 동료들이 글러브를 벗겨주는 찰나에 한 가지 질문이 머리를 스친다. 나는 왜 격투 시합에 나가는가?
링 위의 음악가. 어느 시점부터 나는 스튜디오보다 태권도장에 사는 시간이 많아진 링 위의 음악가다. 사실 음악가라는 호칭을 붙이기에는 내공이 너무도 모자라는 음악 애호가 정도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때 운이 좋게도 훌륭하고 사려 깊은 은사님들을 만나 음악을 배운 나는 20대 때 작편곡과 연주를 넘나들며 음악 언저리를 떠돌았다. 한창 음악적으로 방황할 때는 먹고살기 위해 카바레에서 반주도 해보고 어느 시점에는 정신 차려보니 아이들 피아노도 가르쳤으나 지금은 음반 제작자로서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작은 사업단에서 이런저런 행사를 기획한다. 그러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연을 기획하고 디제잉도 하니 참으로 잡다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을 직업적으로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음악가라고 소개했으나 실상은 음악이란 거대한 우주를 우주선과 분리된 비행사처럼 마구 떠도는 사람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하늘을 우러러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바가 하나 있는데 나 또한 여느 사람들처럼 진심으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떤 시절에는 음악을 듣는 것이 너무도 괴로워 귀가 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서 음악은 내게 아무 잘못을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음악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쟁이가 아니다. 그는 그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물처럼, 바람처럼, 하늘처럼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나는 음악의 이러한 점이 참 좋았다. 그는 거기 있을 뿐이고 나는 가만히 그를 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음악은 다시 한번, 더욱 가만히 들었다. 그럼 어느새 음악이 아주 살짝 자기의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이지만 깊은 압도감이 고막을 울리고 이내 마음을 움직인다. '심동'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내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음이 움직이면 짜릿하니까.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과 몸을 움직이는 격투. 둘 다 무언가를 움직이기 때문에 빠져 들었을까? 20대 내내 작업실에 살던 내가 링 위에서 강한 타격을 주고받는 장면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작업실 안에만 있으면 좀이 쑤셔 20대 때도 운동은 즐겼고 스물여섯부터는 학교 앞의 성인 태권도장을 다녔다. 기합도 넣고 발차기도 하면 스트레스가 날아가 좋았다. 하지만 그때도 격투 선수가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재미있게 태권도를 수련하다가 2년이 지나 좀 더 실전성 있는 무술을 배워 보고 싶다는 제자에게 '실전 태권도'라는 기묘한 이름의 무술을 권유하신 전 도장의 관장님께서 알려주신 주소로 갔다. 격투 상황을 대비해 적극적으로 손을 쓰는 태권도에서 즐겁게 수련했다. 하지만 그때도 격투 선수로서 링 위에 오른 나는 상상하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햄스트링이 짧은지 아빠 다리가 안 되는 이상한 몸. 또래보다 압도적으로 뻣뻣한 팔다리. 그다지 없는 운동 신경. 겁이 많아 몸에 조금이라도 피가 나면 기겁하던 나다. 타고난 근력 또한 약해 평생 무게 치는 피지컬 트레이닝을 요리조리 피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타고나길 폭력적이고 살기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저 사람을 쓰러트려 이겨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악으로 깡으로 상대를 두들기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도 고요하다. 어릴 적 한문 학원 선생님께서 어머니께 내가 얼마나 선비 같은지 하소연하셨다는 일화가 기억난다. 경쟁심을 품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유아독존하며 신선 놀음하는 나를 보고 하신 걱정이리라. 책 보고 음악 듣고 혼자 이곳저곳 다니며 모르는 것을 알아 가고. 지금도 나는 격투 선수 생활을 통해 무도와 격투 경기에 대해 좀 더 알아가서 재미있을 뿐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거나 링 위의 저 사람을 죽도록 패고 싶다는 마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런 재능 없는 나지만 2년 남짓한 시간이 사람을 바꿔 이제는 피와 멍을 달고 살며 가끔씩 찾아오는 갈비뼈 골절에게 반가움도 느낀다. 길고 가늘어 피아노 칠 때 유리한 손가락으로 어느새 정권을 말아 상대의 얼굴과 몸통을 풀파워로 때리는 연습을 한다. 정강이는 그저 발과 허벅지를 잇는 몸의 일부 정도로 생각했는데 매일 밤 정강이를 단단한 몽둥이처럼 만들기 위해 애꿎은 대나무를 패고 또 팬다. 피부에 난 상처가 아물고 고통이 줄어들 때 즈음 어제보다 갈고 닦인 무기를 만져본다. 뼈가 어제보다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아, 오늘도 하루의 수련을 마쳤구나.
나는 왜 격투 시합에 나가는가? 나는 왜 서른 즈음에 느닷없이 링으로 뛰어들었나? 좋은 글은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쓴 글이라고 들었다. 그래야만 나도 몰랐던,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기억과 감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다루던 내가 왜 격투 시합에 나가는지 몇 편의 글을 쓰면서 알아가고 싶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의 링으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