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방과 연차
첫 출근한 날에 인사팀으로 가서 노트북과 업무에 필요한 이메일, 나의 회사 계정을 전달받았다. 주 2회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이 회사는 전 직원이 노트북을 갖고 있다. 핫데스크(hot desk: 자율 좌석제/ 한 자리를 탄력적인 업무시간에 따라 여러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정해진 자리가 없고 매일 자리를 예약해야 하는 방식)로 운영되는 회사 지침에 따라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예약한 자리에 가서 연결하고 근무하는 형태였다.
회사 서버와 마이크로소프트 팀 사용법 등을 간단히 전달받은 후 자세한 회사 투어가 시작됐다. 면접 때는 볼 수 없었던 모형제작실, 프린트실, 다른 층의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보고 인사를 한다.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구나.
층마다 다양한 크기의 회의실이 존재했는데 투명하게 열린 회의실이 있는가 하면, 문을 닫으면 안을 볼 수 없는 회의실도 존재했다. 그중의 하나는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마사지실이었고 후자는 휴식방이었다. 휴식방이라고?
"응, 이곳은 근무시간 중 갑자기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때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 단 우리 HR팀에 먼저 알려줘야 해."
영국 회사는 연차가 기본 20일(많으면 28일)이 주어진다. 여기에 대부분 크리스마스 이후 연말에 1주일씩 회사가 문을 닫거나 뱅크 홀리데이(은행이 쉬면 영국 전체가 쉼)가 8-10일정도 있다. 이 연차는 회사나 직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자유롭게 사용가능하다. 회사 동료가 2주일 씩 휴가를 다녀오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또 병가를 내는 방식이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회사와 조금 달랐다. 아침에 팀장, 인사팀에 메일을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2일까지는 그걸로 충분하고 3일~2주 사이는 의사 소견서나 진단서를 첨부해야 한다. 병원에 가는 일도 따로 개인 연차를 쓰지 않고 인사팀에 병원예약 확정 메일을 전달하면 회사 서버의 개인 근무시간표에 업데이트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허락이 아니라 통보다. 어떤 아침의 팀 전체 메시지들은 조금 놀랍기까지 했다.
안녕, 팀원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출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오늘 하루 쉬고 100% 근무할 수 있는 상태도 내일 출근할게. 인사과에는 메일 보냈어.
친애하는,
팀원 1
맞아, 회사에 일을 계약할 때는 건강한 상태로 한 거니까, 계약 내용이 달라지면 근무하지 않고 쉬고 100%로 가능할 때 하는 게 맞지. 하지만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병가를 내 본 적이 없다. 아니 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멍하니 다른 생각으로 살아지는 삶들에 생각하고 있을 때 엘리스가 다시 투어를 이어간다.
"퀸즈 캐슬"
"응?"
"꼭 외워 둬! 퀸즈 캐슬! 일정수 이상의 인원이 회사는 화재가 발생할 시를 대비해 100미터 이내에 있는 대피소를 지정하도록 영국법이 지정하고 있어. 우리 회사의 대피소는 바로 근처에 있는 펍 '퀸즈 캐슬'이야."
"불이 나면 맥주를 마시러 간다는 거지?"
"하하, 불이 나지 않아도 마시러 가도 되고!"
조금씩 알아가는 회사는 어쩐지 흥미로웠다. 앨리스는 나의 움찔움찔하는 콧구멍을 눈치챘는지 더 많은 정보를 풀어놨다.
매주 배달되는 과일 박스, 월요일 필라테스, 수요일 라이프드로잉, 매달 있는 다른 건축회사와 친선 대결을 펼치는 축구, 크로켓, 소프트볼 경기, 매월 첫째 주 금요일 맥주 파티, 그 외에 점심시간마다 있을 갖가지 교육, 문화 강연. 런던 건축 투어까지. 얼마나 재미있으려고 그러나 정말.
하지만 이렇게 신이 났던 첫 출근의 에너지는 몇 달 후 사그라들었다. 역시나 일은 일이니까. 누가 그랬지? 결혼할 사람은 내가 평생 싸울 사람이고, 직업은 내가 평생 스트레스받을 일이라는 말. 그 말은 진짜였다. 그러나 이 것은 내가 선택한 직업이다. 나는 건축가가 되려고 중학생 때 다짐한 이후로 계속 이 놈의 건축 언제 그만두나 하면서 계속 더 나아지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영국 건축가 선언문을 보게 되었다.
-다음 주는 마지막 연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