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쓰기
HR에서 이메일이 왔다. 거기엔 아래 다섯 가지의 서류들이 함께 들어있었는데, 그중 2,3,4,5번을 채워서 서명하여 보내는 것이 나의 첫 업무였다.
1. 대표의 환영 서문
2. 인적사항 문서
3. 계약서
4. 평등/다양성 조사서
5. 추천인 정보
모든 문서는 인과관계가 잘 정리된 내용들만 적혀있었다. 아무런 질문도 생길 수 없는 간결하고 정확한 정보들이었다. 보안유지 때문에 전문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대표의 환영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신이 [날짜]에 참석하고, [면접관 이름]이 진행한 면접 결과에 따라 우리 회사는 당신을 [직책]으로 [부서]로 [시작 날짜]부터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동봉되는 계약서를 확인하고 문의 사항이 있다면 아래 연락처로 연락하기 바란다.
2. 인적사항 문서
이 문서는 주소, 은행 정보 등을 적는 문서다. 그중에 He/him 일지, She/her 또는 They/them 일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란이 있었는데 이것은 추후에 회사에서 만들어 주는 이메일 서명란에도 사용된다.(자신의 회사 이메일 서명을 개인적으로 바꿀 수 없음)
4. 평등/다양성 조사서
이 조사는 이 회사가 이 만큼 평등하고, 이만큼 다양한 인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 이용된다. 이것을 실시하는 이유는 유럽에서는 얼마나 다양한 인종을 채용하고, 함께 일하냐가 글로벌 회사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이 중요시되는 디자인 회사에서 이런 세계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패션, 화장품 브랜드들은 백인 여성, 위주의 모델을 점점 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회사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이 회사에는 30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는, 100여 개국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5. 추천인 정보
영국 사회는 철저하게 인연, 학연으로 돌아간다. 상위 계층으로 갈수록 더 강화된다. 집을 구할 때는 이전 집주인의 추천서가 필요하고, 학교를 들어갈 때도 성공적으로 졸업한 졸업생의 추천서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회사를 이직할 때는 가장 최근 2개 회사의 추천서가 각각 필요하다. 이 문서는 회사에서 연락을 할 두 명을 추천인의 정보를 제공하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 이전 대표나, 상사의 정보를 적기 전에 당연히 그들에게 나를 추천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고 정보를 적어야 한다. 이 문서를 회사에 제출하면, 회사에서 직접 그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낸다. 이 사람이 우리 회사에 최근 입사하게 되었는데 그전에 당신의 회사에서 일한 내용이 맞는지, 이 직급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게 맞는지를 업무는 잘 이행했는지 간단하게 구두로만 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근엄한 메일로 추천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영국의 건축법상, 건축 고용주는 다음 고용주에 추천서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당사자가 원할 시 이 추천서를 열람할 수 있다. 다행히 나는 이전 2개 회사의 대표들이 정성스러운 추천서를 써 준 덕분에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회사에 따라 이 추천서의 중요도가 다르기 때문에 추천서에 따라 회사는 면접 결과를 번복할 수 있다.
3. 계약서
그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끄는 것은 25가지 항목으로 상세하게 나누어진 바로 이 계약서였다.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보며 꼼꼼히 읽고 있다가 6조. 회사 복지 2항, 단체 보험에서 멈췄다. 단체, 보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각각 아는 영어 단어가 합쳐진 채로 모르쇠로 일관할 때 제일 곤란하다. 그건 어떤 질문부터 해야 될지 모른다는 뜻이니까. 역시, 영국인이 도움이 필요했다.
"단체 보험이라는 게 뭐야?"
곰이 대답한다.
"네가 회사 근무하고 있는 시기에 사망하면 네 연봉의 3-4배를 피상속인한테 지급해 주는 사망 보험이야. 회사 돈으로 가입하는 거고 영국의 큰 회사들에는 대부분 이런 게 있어."
"오, 피상속인은 배우자인 너야?"
"꼭 그렇지는 않아. 그걸 네가 정할 수 있어."
"오 내가 정할 수가 있어? 좀 멋진데? 너도 썼어?"
"그럼. 우리 회사는 연봉의 4배였던 것 같은데. 난 네 이름을 적었지. 어차피 남자가 먼저 죽으니까. 네가 이걸 받을 거야. 축하해."
"아 정말,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먼저 죽을 거야.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진짜."
"남자들이 더 빨리 죽어, 원래. 하하."
웃기지만 웃기지 않은 농담을 하고 회사에 첫 출근을 한 날, HR에서 이메일이 아닌, 봉투에 든 서류를 하나 가지고 내 책상으로 왔다. 이거구나. 상속인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을 적고 서명을 한 후 밀봉해서 제출하라고 하고 그는 사라졌다. 이렇게 첫 출근에 유서를 쓰는 것인가. 서류를 열어보니, '본인이 사망할 시'라고 시작되는 문구가 나온다. 그리고 바로 아래 '피상속인에게 본인의 연봉 4배에 달하는 금액을 상속한다.'라는 웅장한 문장이 이어졌다. 곰이 말한 것처럼 피상속인은 아무나 될 수 있었다. 법적으로 어떤 연관도 없는 사람도 이 빈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문서는 더 이상은 묻지 않는다. 그저 사람의 이름(여러명 가능)과 관계(아무 관계도 아닐 시도 가능) 분할율(한 명일 시 100%) 만 적으면 끝이 났다.
선명하게 곰의 이름과 배우자라고 꾹꾹 눌러썼다. 그리고 100%. 이 봉투를 밀봉하기 직전에 곰과 했던 농담이 생각났다. 이 봉투는 내가 '사망할 시' 에만 열리는 봉투다. 이 봉투가 열렸다는 것은, 곰은 살아있는데 내가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다. 곰의 봉투가 먼저 열렸다면, 영국에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나에겐 없을 테니까.
포스트잇을 하나 뗐다.
내가 이겼지?
곰은 이 농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농담을 하려고 우리는 결혼했으니까. 근데 봉투에 열어보는 곰이 이 포스트잇을 보는 장면을 상상하자, 갑자기 말도 안되게 눈물이 나왔다. 뭐야. 포스트잇을 다시 꺼내 구겼다.
집에 가서 이 얘기를 했다. 네 이름을 썼고, 내 생의 마지막 농담을 너한테 갈기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너무 슬펐다고. 그랬더니 곰이 얼굴이 하얗게 됐다.
"그걸 진짜 봉투에 넣었어?"
"아니, 이상하게 상상이 되니까 너무 슬프더라고."
"하...... 내가 만약에 그걸 보게 됐다면, 그게 나를 완전히 파괴시켰을 거야."
계약서를 쓰다가 눈물이 나왔다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웃긴데, 나는 울었다. 내 농담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구나 하면서 운 건 아니고. 계약서를 쓰면서 생각해보지 못한 내 죽음과 그 이후의 곰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서이다. 계약서가 이렇게 결연하고 웅장하다니 하고 나는 첫 출근을 시작했다. 그러나 더 재밌있고 신기한 복지제도가 이 회사엔 많이 있었다.
-당분간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