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작가
인터넷으로 굽이 있는 구두를 한 켤레 샀다. 평소였으면 잘 사지 않을 뾰족구두인데 왜인지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는 이 구두로 걸음걸이를 좀 고쳐봐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도 함께 다졌다.
‘하찌꼬’. 중학생 때 교복을 입고 걸어오는 날 보고 아빠는 나를 ‘하찌꼬’라 불렀다. 일본어로 숫자 8을 뜻하는 ‘하찌’와 여자 이름 뒤에 붙는 ‘꼬’를 붙여서, 즉 내가 팔자걸음이란 소리다. 아빠가 그렇게 나를 놀릴 때마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 예쁜 뾰족구두를 신으면 저절로 고쳐질 거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32살이 된 지금도 나는 ‘하찌꼬’다. 걸음걸이를 고치는 것은 다 큰 어른이 젓가락질 고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말인즉 나는 젓가락질도 사실 엉망이라는 소리다) 아무튼 20대까지 나는 내가 팔자걸음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아니 가끔은 나 스스로가 굉장히 바르게 걷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스무 살에 혼자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시작하면서 더 이상 나에게 하찌꼬라고 놀릴 아빠도 곁에 없거니와 20대에게는 걸음걸이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는 대학교 생활, 이성 친구, 가끔은 유행하는 화장 등 온갖 사소한 이야기들이 나를 바쁘게 했다. 무엇보다 성악과에 들어간 난 뮤지컬에 빠져 살아 음대에 다니면서 연기, 노래, 안무 레슨을 받으며 지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울은 너무 넓었고 지하철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기에 매일 레슨과 레슨 사이를 넘나들며 걸음걸이를 신경 쓸 여유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살기 바빴다.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대학생의 뾰족구두는 없었다. 물론 내가 키가 커서 높은 구두를 선호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코앞에서 닫히는 지하철 문을 향해 가장 빠르게 나를 옮겨 줄 수 있는 것은 운동화밖에 없었기에 나는 원피스에도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코디 따위 알게 뭐람. 또 학교를 졸업하고는 마냥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에만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도서관, 도넛 가게, 그리고 카페 이곳저곳을 옮기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더 바빠졌지만, 시간은 늘 공평하게 24시간이었기에 매일같이 걸음걸이를 재촉하며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며 산 덕분에 나는 운 좋게도 내가 원하는 뮤지컬단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역시 걸음걸이는 뒷전이었다. 지각할세라 정신없이 달려 출근을 하고 매일 기진맥진할 정도로 안무 연습하는 바람에 돌아오는 퇴근길은 없던 팔자걸음도 생길 만큼 고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마저도 참 행복했다. 그렇게 4년을 뮤지컬단에서 일하고 결혼하며 순천으로 내려왔다. 연고가 없는 순천에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또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그렇게 30대가 되어서도 나는 걸음걸이를 생각할 겨를 없이 열심히 걸어 다니며 기회를 찾아 헤맸고 내 부산한 발걸음은 다시 순천에서 노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합창단에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친한 언니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지인아 너는 다 좋은데 걸음걸이가 좀…….” 아차, 그제야 내 걸음걸이가 생각났다. 잘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 때문에 항상 걸음을 재촉하여 사느라 여태껏 팔자걸음을 고치지 못했구나. 순간 나는 나를 자책했다.
그것도 잠시, 뾰족구두가 문제였을까? 뭐든지 잘 해내고 싶다는 굽 높은 내 마음이 나를 팔자로 걷게 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그런 마음이 나를 계속 노래하게 만들어 줬고 매번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이 뾰족구두는 필요하지 않겠구나. 나는 인터넷 창의 구매 취소 버튼을 눌렀다. 뭐 굳이 인제 와서 팔자걸음 고칠 필요 있어? 에라 모르겠다 팔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