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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 은 Mar 01. 2024

소리 없이 잠든 나의 친구에게 4

#4 시린 바람에 간절히 겨울을 바라던 여름의 나는 사라져간다

정신 없었던 날을 뒤로한 채, 수능이 끝난 다음 날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어색할 무렵이었다. 나는 밖에 나와 볼보와 산책을 했다. 수능이 다가올 쯤 볼보에게 소홀했던 게 미안해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볼보와 보낸 것 같다.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발 옆을 쳐다보면 볼보가 나와 나란히 걷고 있고, 풍경이 아름다워 잠시 멈춰서 한참 바라보다가도 문득 발 옆을 쳐다보면 볼보는 내 곁에서 가만히 자기 털을 정리하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바닥에 냅다 앉아 볼보를 쓰다듬어 주면 그르릉 거리며 애교를 부린다.


가슴 한 켠에 불안함과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그딴 건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내 옆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는 볼보를 보고 있으면 나도 '그딴 건 아무 상관없어도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수능 성적표가 나온 날, 엄마 차를 타고 학교에 가서 나의 수능 성적표가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받아왔다. 차에서 볼 용기가 없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봉투를 꽉 쥐고 있었다.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두통은 수능 성적을 확인하기 직전에 더 심해졌고, 엄마가 내 손을 꽉 쥐어도 멈추지 않을만큼 내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두통 때문에 약을 주려 하는 엄마에게 괜찮다 손짓하고 나는 이젠 피할 수 없다며 서류 봉투를 뜯어 확인했다.


'됐다'.


성적을 확인하고 든 생각은 엄청난 안도였다. 정말 미친듯이 망쳤다고 생각한 결과에 비해 꽤 괜찮게 나온 성적을 보자마자 정말 신기하게 두통이 사라졌고 내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성적이었지만 난 만족했다.


이제 내가 넘어야 할 산은 '면접' 뿐이었다.


몇날 며칠 답답한 가슴을 붙들고 면접을 준비했다. 내가 지원한 대학교 근처에 자취하는 친구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 날 면접을 봤다. 그렇게 총 3곳의 대학교에 면접을 보러 갔다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대학 합격 발표날이 다가왔다.


그 날은 새벽 12시 7분이었다. 내 옆엔 엄마가 자고 있었고, 난 여느 때처럼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몇 시인가 확인했을 때 내가 희망하는 대학교의 합격 발표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합격 발표가 그 당일 적어도 오전 10시쯤에 홈페이지 조회가 가능한 줄 알았기에, 정말 아무 생각도 기대도 없이 홈페이지에 들어가 조회를 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제 학교에 입학할 일만 남았다.

이제 아무런 죄책감 없이 놀 수 있는 날이 펼쳐져 있다.


이제 시린 바람에 간절히 겨울을 바라던 여름의 나는 사라져간다.

그렇게 잊어간다.



결과는 과정을 미화시켜 주기에 충분한 증거물이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떻게 하루 하루를 살아냈는지 그 결과 하나에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에 충분하다.


넘실대는 파도가 가진 많은 상처는 저 깊은 바다가 보듬어주곤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파도는 넘실대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아래에 존재하는 바다를 잊어버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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