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디 맑은 여름날 오후, 잔디에 놓인 나무판자, 그리고 그 위에 앉아 멍하니 같은 곳을 바라보던 너와 나, 내 옆에서 함께 여름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던 몇 분 안 되는 그 순간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시간은 꽤 빠르게 흘러서 어느덧 수능이 얼마 안 남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가을로 들어서면서부터 볼보를 잘 보지 않기 시작했다. 활짝 열어두던 창문을 꽉 닫기 시작했고, 서랍에 차 있던 고양이 간식들은 모두 사라졌다.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질 틈이 없었고,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었다.
9월 모의고사를 10월쯤 봤었다. 그러나 10월에 본 9월 모의고사 점수는 처참했다. (그러고 보니 매 모의고사를 잘 보지 않았던 것 같은.. 하하)
어쨌든 그 후로는 이때까지 나왔던 모의고사들을 다 프린트해서 미친 듯이 풀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11월이 되었을 때 모의고사만 봤을 땐 내가 목표한 과목들의 성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볼보를 제대로 못 봤지만 그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볼보의 부름도 무시한 체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다. 수능 전날,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어떤 기분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엄청난 부담감과, 또 실패할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 그리고 두려움. 그러나 저런 것보다 좀 더 복잡하고 답답한 그런 기분이었다.
결국, 수능 날의 아침이 밝았다.
생각보다 별 느낌은 없었다. 날씨도 생각보다 따뜻했고, 약간 멍하기만 했다. 수능을 보러 엄마 차에 타기 전 나는 볼보를 볼 수 있었다. 잠깐 쓰다듬어 주곤 서둘러 출발했다.
수능장에 도착한 나는 2년 전 졸업한 이후 한 번도 못 뵀던 선생님들을 다 뵙고 약간의 머쓱함을 뒤로한 채 급히 수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을 어떻게 쳤는지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점심으로 챙겨간 도시락도 절반을 남겼다. 영어 때부터 멘탈이 터져서 정신 차리고 보니 끝나 있었다. 정말 멍한 상태였다. 수능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서 본 하늘은 정말 예뻤다. 날씨는 너무 좋았고, 기분 좋은 따스함에 선선히 부는 바람, 유난히도 예쁜 하늘이 내 기분을 더 미묘하게 만들었다.
엄마가 일하는 곳에 갔다. 퇴근시간에 맞춰서 잠시 기다린 후 엄마와 얘기를 하다가 집에 왔다.
영어는 시간이 부족해서 찍은 것들이 많았고 멘탈은 나가서 가채점할 정답을 적어두지도 않아서 내가 몇 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수능 점수가 나오기 전까지 난 망했구나 라는 생각만 내내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