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내 친한 지인이 키우던 고양이 2마리가 새끼 고양이 11마리를 낳았다. 그중 1마리 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새끼 고양이들을 보러 가곤 했었는데 그러다 2020년 6월,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내가 볼보를 만난 건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후였다. 서울에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한 뒤, 연기자라는 꿈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고 나서, 지인이 예전에 태어났던 아이들 중 한 마리라며 내게 보여준 것이다. 11마리의 아이들 중 지인이 선택한 고양이는 하얀색과 주황색 털을 가진 예쁜 아이였다.
고양이는 새침한 면이 많다고 생각해서 내가 부르면 안 오겠거니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친구(=지인)가 볼보라고 불러보라 했을 땐 나에게 오지 않겠거니 생각했으나, 나의 부름에 천천히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그것이 볼보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고 지겨운 하루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던 6월의 어는 날, 그날도 어김없이 틀린 표시만 가득한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테이프로 붙이던 날이었다. 늘 답답하고 불안한 맘을 달래려 무작정 밖을 나서곤 했다. 그런 내 앞엔 언제나 날 향해 다가오는 볼보가 있었다.
볼보는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나타나곤 하지만 자주 내가 볼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늘 한결같은 곳에 있던 볼보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날도 어렵지 않은 곳에서 볼보를 찾은 난, 자리에 주저앉아 잔디 끝 소파에 누워있는 볼보를 향해 손을 뻗어 볼보를 불렀다. 내 손에 얼굴을 비비러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보면 예상과 전혀 빗나가지 않게 볼보는 천천히 걸어 나와 내 손에 얼굴을 갖다 댄다.
내가 부르면 오는 존재가 있었다. 내가 부르면, 어디서든 걸어 나와 내게 온기를 나눠주는 존재가 생겼다. 그게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주었는지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알게 됐다.
나는 그 이후로 틈이 날 때마다 볼보를 보러 갔었고, 갈 때마다 밥을 주곤 했었다. 밥그릇 또한 밖에 있었고, 사료 또한 밖에 있었기에 자주 줬다. 이건 여담이지만 간식을 좀 많이 사다 줬다. 나는 적당히 줬다 생각했는데 몇 달이 지난 후 볼보의 모습은 처음의 모습은 온 데 간데없고 뚱냥이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야 볼보 살 너무 쪘지 않아?"라는 말을 들은 후에야 알았다. "아, 좀 그렇긴 하네."..
그렇게 볼보는 내 하루에 조금씩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뜨거운 태양으로 눈을 찌푸리게 될 땐 저 멀리서 조금씩 다가오는 커다란 구름을 기다리게 된다. 짧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유일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그림자는 제대로 된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감히 태양조차 그때만큼은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구름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림자를 기다린다. 그 아래엔 너와 내가 두 눈을 마주 보고 잠시 뜨거운 태양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뜨거운 현실은 잊고 아주 찰나의 시원함을 너에게서 얻는다. 너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