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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ㅁㅁㅁ Oct 17. 2022

편지, 이게 뭐라고

2022.5

기분 좋은 금요일, 아이들의 편지가 각반 담임 선생님들의 입김을 타고 하나둘 날아왔다. 스승의 날 무렵이면 작년 담임 선생님이나 전담 선생님께 편지를 전하도록 하는 문화가 있다. 복도에서 작년 우리 반 아이들이 종이꽃을 품고 달려왔다. 


“우와 얘들아. 꽃 너무 예쁘다. 뭘 이런 걸 다 만들었어. 감동이야. 편지 잘 읽어볼게.” 


시켜서 쓴 거 뻔히 아는데, 알면서도 행복했다.

    

“선생님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정말 좋아요.”, “선생님과의 시간이 모두 기억에 남아요. 그냥 선생님과 수다를 떤 것 같지만 저에게는 아주 행복했어요!”, “영어 시간에 재미있는 걸 많이 배워서 기분이 좋아요.”, “쌤이 작년에 82세라고 하셨죠. 쌤은 올해 29세이신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이 더 멋진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축복할게요.”          


빅히어로의 베이맥스가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을 폭 안아줄 텐데. 생일날 카톡에 답하듯, 다정함을 다정함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다음에 고맙다고 인사할 기회가 있을까. 나야말로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지 짧게라도 답장을 써볼까, 잠깐 고민했다. 그치만 인원이 많기도 하고, 이런저런 시선이 의식됐다. 아이들에게 종업식날이나 일기장에다 편지를 써준 적은 많아도, 답장을 해본 적은 거의 없다. 


그 다음 주에 수업 마치고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제 편지 보셨어요?” “어어, 아침에 보고 깜짝 놀랐어. 편지로 책을 만들어주다니 진짜 내용도 정성도 진짜 감동이야.” “틀린 문장은 없었어요?” “응. 술술 읽혔어. 이런 편지는 처음이야. 가보로 간직해야지.” “주말에 열심히 만들었어요.” 사실 그 아이의 이름을 아직 못 외워서 긴가민가한 상태로 겨우 대답한 거였다. 따로 시간을 내서 마음을 써준 게 고맙고 미안했다.  


또 작년 우리 반이었던 Y가 물어봤다. “선생님, 혹시 그 편지 보셨어요?” “어, 봤지. 선생님이 좋아한다고 했던 포도를 기억해서 그려줬더라. 어쩜 그렇게 섬세해? 고마워.”     


몇 차례 더 아이들을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말로만 때우자니 민망했다. 사람 마음은 다 같다. 진심을 표현하고 나면 상대방의 반응이 궁금하기 마련이다. 카톡 한마디라도 상대방의 답을 기다리게 되지 않는가.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학창 시절을 떠올려봐도 그랬다. 스승의 날에 윤리 선생님께 두 장 가득 편지를 드린 후,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물론 한결같이 잘 대해주셨다. 아무래도 교사는 대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 보니, 연예인에게 팬레터를 보내면 당연히 답장이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딱 한 번 또래가 아닌 어른에게서 답장을 받아본 적 있다. 청년부 목사님이다. 수십 명 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받으셨을 텐데, 거기에 정성껏 답장을 보내주신 것이다. 놀랐다. 심지어 내가 보낸 것보다 길었다. 마음을 표현했더니 더 진하게 표현해주셔서 되려 감동이었다.      


답장을 쓸까 말까. 아이들은 정작 별생각 없었을 텐데, 이게 뭐라고 혼자 신경 쓰는지. 혹시나 편지를 안 썼던 다른 아이들이 의식하거나, 다른 선생님과 비교되지 않을지 신경 쓰느라 주저했고, 의례적으로 쓴 편지에 혼자 유난인 것 같았다. 답장 대신 더 좋은 수업으로 보답하는 게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쪽이 들썩거렸다. 몇 년 전에 본 영화 포스터의 문구가 생각났다.


한때 영화 포스터를 열심히 모으던 시절, 책상 쪽 벽면에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할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알 파치노의 주름진 옆모습이 있고, 그 위에는 우산 든 토토로가 하늘을 나는 식이다. 그중 유난히 자주 보게 되는 분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 추기경>이다. 주변 포스터들과 달리 화면 가득 웃는 표정에 자연히 눈이 갔다. 옆에는 소개말이 적혀있었다.           


“편지를 받으면 답장을 꼭 함, 왼쪽 귀가 거의 안 들림, 콧바람 소리가 매우 큼, 8남매 중 막내, 혈액형 AB형, 키 170cm, 심한 불면증 있음, 간혹 무뚝뚝함, 띠는 개띠”           


병풍 같은 정보들에 비해 “편지를 받으면 답장을 꼭 함”이라는 말이 유난히 튀었다. ‘꼭’에는 언제나 ‘정말?’과 같은 의문이 따르는 법인데, 이상하게도 매번 그 질문은 나를 향했다. ‘나는 답장을 하는가?’라고 물어보면 지난날의 보내지 못한 답장들이 떠오르다가 시선을 돌리곤 했다.    


결국 답장을 쓰기로 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았던 탓이다. 한 명 한 명 길게 쓰는 건 피차 부담일 것 같아서 정사각형 메모지에 가볍게 전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쿨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답이 떨어졌다.  


영어 선생님이니까 영어로 쓰자. 편지를 주면서는 이참에 영어 공부하라고 말하면 되겠다. 공부라면 지긋지긋할 테니까 달갑지 않을 테고, 진심을 충분히 희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에 영어 공부를 더한다면 얼마나 교육적인가, 하면서 혼자 뿌듯해했다. 공통되는 문장을 빼고는 아이들마다 얼굴을 떠올리면서 변화를 줬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재밌었다. 마음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게 조금 더 기쁜 일인 건 확실했다.      


  “그때 편지 고마워서 써봤어. 집 가서 해석해봐.”


삼십여 장을 완성하고, 학교에 가서 아무렇지 않은 척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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