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dolf Apr 19. 2021

아주 슬픈 (8&9/20)

8     


송정섭은 무의도에는 가지 않았다. 이미 그곳에는 자신의 가족이 없다. 부친은 행방불명되었는데, 아직 생존해 있다면 100세 가까이 되었겠지만 그나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수십 년 전에 이미 암흑과 같은 바닷속에 수장되었는지, 아니면 보안사 말대로 월북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떻든 이제 와서는 송정섭과는 무관하다. 다만 장례는 물론 제대로 제사 한번 못 지내드린 것이 죄송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문 받다 죽은 형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어머니는 어디에 묻혔는지, 죽은 두 누나의 무덤 역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알려준 사람도 없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런 모든 것들이 감옥에 있는 송정섭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차라리 죽은 이들이 편할 것 같았다. 40년 이상 시멘트 벽 마주하고 산다는 것이 죽은 것보다 나을 것 하나도 없으니까. 단지 끝까지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했었던 것밖에는 그 시멘트 공간에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송정섭은 살아서 나왔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감옥에서 열심히 몸 관리를 한 덕에 송정섭은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과거의 어른들이 환갑 넘으면 대개 골골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의 송정섭은 청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펄펄 끓는 이 청년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적이었고, 지금도 적인 자신이 눈을 의심할 정도로 천지개벽을 한 이 화려한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가석방이 됐지만 언제든지 다시 들어갈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되겠지만, 그거야 저들이 판단하기에 달려 있다. 어떤 이유로든 송정섭이 조금이라도 대한민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갖다붙이고서 곧바로 잡아갈 수 있으니까. 송정섭은 만나는 사람도, 가는 곳도 모두 기록했다가 보고해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누락시키면 자유는 취소다.

    송정섭은 지난 45년 간 오직 미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녀의 손. 작고 따스했던 그 손. 이제는 얼굴도 생각이 잘 안 난다. 앳되고 여린 그 모습. 교도소의 좁은 공간에서 늘 벽만 향한 채 송정섭은 그녀만 생각했다.

    언제 다시 미연을 품을 수 있을지. 언제 다시 그 얼굴 만져볼 수 있을지. 언제 또다시 그녀가 속삭이던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그러나 그 얼굴, 그 미소, 그 모습은 차츰차츰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그 이름만 지금까지 남아 있을 뿐, 그 모습은 점차 희미해져 가서 이제는 형체도 남아 있지 않고 그림자인 듯, 안개 속 허상인 듯 저 먼 과거로 사라져 가는 미연. 이것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45년이 훌쩍 지나가고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녀.

    과거 그녀의 집 전화번호도 언젠가부터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송정섭은 자신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고서 과거의 모든 것은 다 잊기로 했다. 지나간 기억들을 적어놓지도 않았다. 자신은 감옥에서 평생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의 기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미연 그 애만은 너무 그리웠다. 너무도.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를, 그 손을, 그 얼굴을 만져볼 수 있다면.

    그 애 목소리, 너무도 다정하고 달콤했던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지금 살아 있을까?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있을 텐데…….

    아니야, 늙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남자의 품에 있더라도 늙지는 않았을 거야. 옛 모습,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여리고 어여뻤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한 번만, 한 번만 그 애를 볼 수 있다면…….

    그러고 나서……, 나는 죽으리라.

    감옥에서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번의 자살시도가 모두 무위로 끝났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러니 단 한 번만이라도 미연을 볼 수 있다면 그때는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도시도, 마을도, 길도, 산도, 들도, 강도, 하늘도 다 바뀌었다. 사람들 모습도 바뀐 것 같았다. 미래 도시, 미래 마을, 미래 인간들……. 송정섭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미래형이다. 송정섭 자신에게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그러나 그 미래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떠올라 있는 것이다. 단 하나, 미연만은 과거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 그리고 송정섭에게는 현재가 없어졌다.  

    어머니와 두 누나의 죽음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다. 부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그 밖에 송정섭 주변의 모든 이들에 대한 것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송정섭은 매일 걸었다. 무턱대고 걸었다. 자신의 동네를 지나 외국 풍경처럼 변해 버린 마을과 도시 곳곳을 걸었다. 너무도 잘 정비되고 깨끗한, 영화 속의, 소설 속의, 미래 속의 도시를 걸었다. 그들 풍경은 그의 상상으로서도 닿지 못할 광경이었다. 대한민국은, 세상은 이토록 변했는데 송정섭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간첩, 불순세력, 적대세력.

    이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송정섭은 걸으면서 자신을 학대했다.

    감옥에 있을 때보다 더 자기 자신을 괴롭혔다.

    괴로웠다.     


송정섭은 차는 거의 타지 않았다.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 사람들마다, 집집마다 차를 가지고 다닌다. 비행기도 사람으로 메워진단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송정섭은 걸었다. 걸어서 구석구석 다 다녔다. 저녁때 지쳐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걸었다. 그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도서관, 영화관, 식당에도 가보았으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잘 가꾸어진 공원이나 강변길도 어색했다. 산행길도 불편했다. 곳곳에 세워진 편의시설과 반듯반듯 정비된 도로, 길, 강, 산, 빌딩과 주택 이 모든 것이 다 불편했다. 어색했다.

    그래도 걸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송정섭은 마음에 계획한 대로 필요한 것들을 사모았다. 몇 가지 되지도 않지만.

    그와 동시에 미국대사관으로 망명하는 것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메시지. 그러나 어떻든 미국대사관이나 문화원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알아두었다. 위치나 주변 광경들. 직접 가보기도 하고 인터넷으로도 확인했다. 그리고 자료도 모았다. 하지만 송정섭 스스로도 그 의미를 모르는 망명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없었다. 그 이유라도 알아야 시도를 해보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은, 송정섭은 세상이 자신을 잊은 줄 알았는데 누군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신기하고도 의문스러웠다. 그는 누구인가? 아군인가, 적군인가? 그리고 송정섭의 주소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 또한 비밀일 텐데. 송정섭 자체가 비밀일 테니까.     


송정섭은 늘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것은 없었다. 모두가 자기 일 바쁜 사람들. 다만 한 가지, 거리 곳곳에 골목마다 건물마다 설치된 감시카메라가 께름칙했다. 그것을 통해 송정섭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녹화되고 전달되고 감시될 것이다. 세상은 좋아지고 편리해졌지만, 그것만은 엿 같았다. 숨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정섭은 숨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감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미 저들이 모두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송정섭은 자신에게 들킬 비밀이 남아 있는 것같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특히  편지가.

    편지. 미국대사관. 망명.

    생각해 보니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다만 그 이유를 모를 뿐이다. 망명의 이유.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것, 망명 그 이후. 아니, 망명을 받아주기라도 할 것인가? 그것보다도 미국대사관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미국 이민을 신청하고 영사과에 들어간다? 송정섭에게 이민신청 자체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송정섭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 본들 어차피 알아내지 못할 테니까.

    그보다는 송정섭은 이미 다른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9     


미연은 카라카스의 한국대사관 안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 여권을 발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야만 한국으로, 아니면 다른 나라라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사관에서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미연의 신분 문제 때문이었다.

    미연은 브라질로 이민 간 사람이다. 여러모로 조사해 본 결과 한국에서 출국한 사실과, 미국 LA를 거쳐 브라질로 입국한 사실은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브라질 교민사회에서도 미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미연의 말에 의하면 브라질에 도착해서 얼마 안 되어 몇몇 교민 가정과 일본인 이민자들과 함께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일본대사관에 문의해 보았어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항이라고 할 뿐이었다.

    게다가 더 골치 아픈 것은, 미연은 여권이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서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점이다. 따라서 밀입국자 또는 불법체류자에 해당한다. 또한 미연은 자신이 어떻게 브라질에서 베네수엘라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베네수엘라 남부는 길게 브라질과 맞닿아 있고 국경 근처는 깊은 밀림으로 되어 있어서, 그중 어느 곳으로든지 국경을 넘을 가능성은 있다. 아마존 강의 지류는 국경에서 한참 먼 곳까지 올라와 끊어져서 강으로는 국경을 넘을 수 없다. 베네수엘라는 브라질의 로라이마(Roraima, 호라이마)주와 아마조나스(Amozonas, 아마소나스) 주와 붙어 있는데, 특히 베네수엘라의 치안상태가 열악해서 그 긴 국경 어느 곳을 통해 밀입국했어도 당국에서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수많은 마약조직이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어서 일반인은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동양인인 미연이 혼자서 그 국경을 넘어왔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마약조직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따라서 브라질로 이민 간 미연이 여권이나 다른 어떠한 신분증도 없이 수십 년 만에 갑자기 베네수엘라의 지중해 연안 휴양도시 카라발레다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어떠한 식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것이야 어떻든 이 여자는 왜 지난 40여 년의 세월을 설명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설명을 못 하는 것일까?

    혹 기억상실? 그러나 미연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렇다면 어떤 범죄? 이것이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인다. 그리고 남미에서 말 못 할 범죄라면 하나밖에 없다. 마약. 게다가 마약과 연관이 있다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게 된다. 그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이 다치게 되니까. 정부 관료나 경찰,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외교관까지도. 어떤 경우에는 평생 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외국으로 도망간다 해도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혹 한국과 같이 아직은 마약 청정국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에서조차 그렇다. 남미 마약조직은 다른 외국 마약조직이나 기타 다른 조직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서로 간에 복수나 보복을 대행해 주기도 한다. 이들은 전 세계적인 카르텔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구상 어느 곳에서든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이 있기 때문이다. 막대한 돈.

    그리고 미연에게는 또 한 가지 불리한 것이 있었다. 손끝이 다 닳아서 지문이 채취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끔찍한 고생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런 중에도 다행인 것은 처음에는 한국말이 약간 서툴렀으나 곧 회복되었다는 사실이다. 너무 오랫동안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은 탓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미연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대사관에서는 한국 정부에 미연에 대해 알리고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미연이 말한 친척들은 대부분 사망했거나 거주지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미연의 생각에는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회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연이 간첩 관련자와 연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는 미연의 존재 자체를 거부할 것 같았다. 게다가 미연이 브라질에서 베네수엘라로 들어온 행적이 불분명하여 잘못하다가는 여러 국가와 연결되는 외교문제로도 발전할지 모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게다가 40년 이상의 세월에 대해 전혀 밝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위험성을 지닌 인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베네수엘라나 브라질 정부에게 연락해서 미연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해서 혹 마약이나 다른 범죄에 연관된 것이 밝혀지면, 그때는 한국대사관은 물론 한국 정부로서도 전혀 관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대사관에서는 미연에 대해 손을 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다음 화로 계속]

이전 08화 아주 슬픈 (7/2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