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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은 오늘 또다시 무의도로 향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 파김치가 되어 피곤한 몸으로 전철 손잡이에 매달려 반쯤 잠기는 눈을 억지로 버티면서 집으로 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송연은 얼른 버튼을 눌러 꺼버리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몇 정거장 더 가서 전철에서 내렸다. 송연은 평소에는 모르는 전화는 거의 받지 않는다. 그러나 어제 저녁때는 혹 그 주민센터 직원이 한 전화인지 몰라 벨이 울리는 대로 얼른 받았다. 그래 봤자 두 번이지만, 아무튼 두 번 다 판촉전화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것이겠거니 하면서도 혹시나 하면서 안 받은 번호를 눌렀다.
“아, 예, 저는 아까 낮에……, 무의도주민자치…….”
“아, 네네네, 저 저 접니다. 아까 전화 주셨는데 제가 전철 안이라서 못 받았어요.”
“네네, 괜찮아요. 저, 얘기해 드릴 것이 좀 있어서요.”
“네네네…….”
“혹시 모르니까, 무의도에 있는 교회에 한번 찾아가 보세요.”
“교회……?”
“네. 무의도에서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 중에서 혹시 그분, 송정섭 씨라고 했나요? 그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요.”
이렇게 해서 오늘 아침 일찍 또 송연은 전철을 몇 번 갈아타고 인천공항역에 내려 자기부상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송연은 인천공항역에 올 때마다 마음이 힘들었다. 계획대로였으면 지금처럼 무의도 쪽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여행가방 두세 개를 가지고 공항청사로 들어가 출국수속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도 가는 길에 가장 힘든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하지만 송연 스스로 택한 것이기에 마음 단단히 먹고 이겨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만 그러할 뿐 마음은 달랐다.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송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또다시 자기부상열차에 올라탔다.
무의도에 들어가 버스에서 내린 송연은 근처 교회를 찾아보았다. 인구가 1천 명도 안 되는 섬이어서 그런지 잘 알려진 교회는 두 곳뿐인 것 같았다. 어느 조그만 건물에 아주 작은 개척교회가 하나 있는 것을 본 것 외에는 그밖에 다른 교회는 찾을 수 없었다.
송연은 그 교회 중 한 곳으로 향했다.
송연이 교회 근처로 가서 기웃거리는데 부근에 있던 키가 아주 작은 할머니가 유심히 쳐다본다. 여든은 족히 넘었을 법한 분. 아흔도 더 된 듯한 느낌. 그리고 할머니에게는 아주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심한 곰보에 얼굴은 아주 못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허리까지 구부정해 있었다.
송연은 좀 무안해하며 할머니에게 다가가면서 물었다.
“여기 목사님 찾아왔는데 계신가요?”
“무슨 일이우?”
“저, 혹시 이 무의도에서 오래 사셨나요?”
“그것은 왜 물어보는 게요? 무슨 일 있소?”
아주 퉁명스런 목소리.
송연은 할머니 가까이로 더 다가갔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여기 아주 오래전에 사셨던 사람들 중에서 혹시 송정섭이라는 분 기억하세요?”
할머니는 순간 멈칫한다. 무엇인가가 떠오른 것인지, 아니면 경계하는 것인지, 혹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를 야릇한 표정.
“혹시 여기 목사님은……?”
송연이 다시 입을 열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대답한다.
“심방 가셨수.”
할머니 대답이 아주 간단하다. 무엇인가 못마땅한 듯. 아니면 경계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돌아서거나 송연을 무시하려 들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궁금해하거나 그보다 더 나아가서 적의를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송연의 마음이 약간 찔끔했다. 혹 자신이 실수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한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에.
할머니는 말없이 서서 계속 송연을 쏘아보는 듯했다. 그 눈동자. 무척 깊어 보인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모든 것이 그 속에서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 눈에 비쳐 보이는 분노. 그래, 그것은 어떤 분노였다. 송연은 안다. 그 분노를. 자신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송연에게 얌전하고 참하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고아원 공동생활에서 송연은 한 번도 남의 눈에 벗어난 적이 없었다. 늘 말없이 모든 것에 따랐다. 아마 천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라면서 송연은 남몰래 분노를 키우고 있었다. 송연 스스로도 그것을 몰랐다. 대왕참나무 숲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고 있을 때 환희와 감격뿐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도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가끔 송연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때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히 사춘기가 주는 감정의 변화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도 어쩌다 피가 끓어오를 때, 송연은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곤 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노였고 증오였으며 복수심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더 나아가서 영혼 깊숙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눈에서 송연은 자신과는 다르지만 그러한 분노가 순간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서러움일지도 모르지만.
송연의 마음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대왕참나무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 어떤 때는 시원해서 송연을 식혀주고 위로를 보내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어둠의 속삭임처럼 들려오는 바람, 소리.
소리가 커진다. 바람이 몰아쳐 온다.
격렬함이 갑자기 송연을 휘감는다.
송연은 숨이 가빠졌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송연은 내면의 바람을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위장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면서 큰 숨을 몰아쉬는 방법을 익힌 것이다.
송연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에 다시 얼굴을 살며시 들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이 경우 대개의 사람들은 송연이 상대방에게 다소곳한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여긴다.
할머니의 눈에서 긴장이 다소 사라지는 느낌이다.
송연은 할머니 앞으로 한 발 더 옮겼다. 그리고는 멈춰서서 다시 물었다.
“송정섭이라는 분이 아주 오래 전에 여기 무의도에서 살았다던데…….” 송연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뒤에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제가 그분 외손녀 됩니다.”
할머니의 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분을 찾고 싶어서 왔어요. 저는 그분을 아직 몰라요. 보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꼭 찾고 싶어서…….”
송연의 코끝이 갑자기 매워진다. 그러더니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할머니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이제는 방금 전의 것이 아니었다.
송연은 가만히 서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