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여린마음 하늘천 심어놓고
밤토록 은하길에 고운님 그려그려
새벽녘 계명성빛에 아스라이 지리라
아리야 은하길을 남몰래 더듬어서
임금님 문지방에 한방울 눈물자욱
님계신 구중궁궐에 흩뿌려이 남기리
긴긴밤 설워설워 처마끝 매달려서
혹여나 님이님이 눈길을 주려마려
지친맘 눈물겨울어 감싸안고 가소서
*
옛날 옛적 저 멀리 뒹국에서 어여쁜 한 여인이 구중궁궐에 들어가 임금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궁궐에 미인들이 어찌나 많은지 저마다 미모를 뽐내며 임금님 눈에 들기를 기다렸다. 그런 중에 다소곳한 한 여인이 저 끝 방에 홀로 남아 임금님 곁에는 가볼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오던 임금님이 멋들어진 꿩 한 마리 놓친 것이 몹시 분해 성큼성큼 걷던 중에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급히 달려와서 부축하여 가까운 정자로 모셨는데, 마침 그곳에 한 여인이 앉아 꽃 자수를 놓고 있었다. 그 꽃은 연주황빛 아리아리하면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어딘지 부끄리며 저를 감추는 듯했다.
여인은 임금님을 보자 황급히 일어나 깊이 절을 하고 한쪽으로 물러나다가 그만 꽃 자수 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임금님이 그 자수 꽃을 보고 하도 색이 고와서 허리 굽혀 집어들고 자세히 들여다본 뒤 여인을 올려다보니 빠알간 볼에 수줍음 가득 넘치고 자태도 너무 아리따워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눈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떠듬떠듬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소화(霄花)라 하옵니다.”
“허허, 하늘꽃이라는 말이구나.”
여인은 더욱 깊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네 모습은 이 꽃보다 더 곱구나. 네 자태가 마치 능소화로다.”
능소화(凌霄花)의 능(凌)은 능가한다는 뜻이며, 소(霄)는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능소화는 곧 하늘보다 더 높은, 또는 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다.
이날 여인은 원앙금침에서 임금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어쩐 일인지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가도 임금님으로부터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실은 궁의 여인들이 소화를 시기하여 온갖 이간질을 한 탓이었다.
소화는 임금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서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 뒤 임금님이 이번에도 사냥을 나갔다가 한 정자 곁을 지나면서 문득 그곳에서 소화를 만났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그녀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그 꽃을 능소화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에 목말라 하늘에 오른 여인.
*
능소화는 덩굴식물이어서 나무나 기둥 같은 곳에 달라붙어 가지가 빙글빙글 돌면서 하늘로 올라간다. 높이 오를 때는 10미터 이상, 즉 3층 건물 높이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중국의 중남부가 원산지이며, 오래 전에 한반도에 들어와 특히 양반들이 많이 길러서 ‘양반꽃’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학명은 Campsis grandiflora (Thunb.) K. Schum 또는 Bignonia grandiflora Thunb. 다른 이름으로는 금등화(金藤花), 자미화(紫薇花) 또는 자위(紫葳)라고도 한다. 여름에 주황색 꽃이 피며, 10월에 열매를 맺는다. 다른 여름 꽃들보다는 늦게 피는 경향이 있으며, 요즈음은 여름철 내내 사찰이나 아파트 정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꽃의 자태가 하도 고와서 하늘을 능가한다는 뜻에서 능소화라 했다고 하나, 나무둥치에 기대어 올라가며 자라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 또는 여성, 명예
공자가 지은 《시경(詩經)》의 첫 장 첫 구절은 다음에 소개하는 〈국풍(國風)/주남편(周南篇)〉이다.
關雎(관저) | 물수리 우짖고
關關雎鳩(관관저구) | 꽈악꽈악 우짖는 물수리
在河之洲(재하지주) | 황하 모래톱에 사는구나
窈窕淑女(요조숙녀) | 곱고도 얌전한 요조숙녀
君子好逑(군자호구) | 대장부 좋은 배필이로다
參差荇菜(참치행채) | 들날쭉 솟아오른 마름풀
左右流之(좌우류지) | 이저리 흔들리며 흐르고
窈窕淑女(요조숙녀) | 얌전한 자태의 요조숙녀
寤寐求之(오매구지) | 자나깨나 짝을 찾는구나
求之不得(구지부득) | 찾고찾아도 찾지를 못해
寤寐思服(오매사복) | 자나깨나 애만 태우는데
悠哉悠哉(유재유재) | 마음 애틋하고 그리워서
輾轉反側(전전반측) | 잠 못들고 뒤척이는도다
參差荇菜(참치행채) | 들날쭉 솟아오른 마름풀
左右採之(좌우채지) | 이리저리 헤치며 노니는
窈窕淑女(요조숙녀) | 곱디고운 참한 요조숙녀
琴瑟友之(금슬우지) | 참으로 금슬좋은 배필감
參差荇菜(참치행채) | 들날쭉 솟아오른 마름풀
左右芼之(좌우모지) | 이저리 헤치며 모아들여
窈窕淑女(요조숙녀) | 곱고도 얌전한 요조숙녀
鐘鼓樂之(종고락지) | 풍악을 울리며 노니도다
이 시는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 근엄하신 공자께서 세상을 가르치기 위해 내세운 글의 첫 소절이 바로 사랑이다. 이 말은 곧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가치 중 첫 번째라는 것이 아닐까?
送人(송인) | 님을 떠나보내며
- 정지상(鄭知常, ?-1135, 고려 중엽)
雨歇長堤草色多 |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 | 별루연년첨록파
비 그친 길고 긴 강둑에 풀빛은 짙고
그대 떠나보내는 남포의 서글픈 노래
대동강 흐르는 물은 언제 마를까마는
이별의 긴긴 눈물 해마다 보태는도다
이별은 슬프다. 내가 떠나도 슬프고, 님이 떠나도 슬프다. 여인이 슬프면 남정네가 어이 슬프지 않으리. 사나이 아린 가슴, 가시내 마음이 녹아내린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가슴 아린 시 세 편을 다음에 소개한다.
꿈 깨고서
님이면 나를 사랑하련만은
밤마다 문 밖에 와서 발자취 소리만 내이고
한 번도 돌아오지 아니하고 도로 가니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러나 나는 발자취나마 님의 문 밖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사랑은 님에게만 있나 봐요
아아, 발자국 소리가 아니더면
꿈이나 아니 깨었으련마는
꿈은 님을 찾아가려고 구름을 탔었어요
나는 잊고자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을까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하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되고
님 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동짓달 기나긴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春風 이불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날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명월(明月) 황진이(黃眞伊, 1506~67)
- 이 시조는 조선 초기의 중종(1488~1544, 재위 1506~44) 연간에 황진이가 6년간 동거한 이사종과 헤어진 뒤 그리워 부른 노래. 여기에서 ‘어론님’은 추위에 몸이 꽁꽁 언 님, 즉 정든 님이라는 뜻.
사랑은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인가 보다. 특히 이별이 포함된 사랑은. 그러나 그 사랑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하고, 때로는 목숨보다 소중하다. 그리하여 사랑은 다음의 구절에서 완성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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