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동달이베개 애가

by Rudolf

두동달이베개 애가


진달래 달래달래 꽃먹고 새잎먹고

꽃먹고 새잎먹고 한바퀴 빙그르르

떠난님 오시려는지 먼산보고 아르르


첫날밤 신새벽에 서방님 끌려가고

긴긴밤 홀로홀로 가신님 그려그려

베갯맡 아로새겨진 그리움만 아르르


베갯맡 속삭이던 그얼골 그려그려

나죽고 님그리워 뒷산에 올랐더니

진달래 붉은꽃망울 아름저름 아르르


종다리 철쭉철쭉 한낮에 우짖어도

가신님 가려가려 떠나는 걸음걸음

한번만 뒤돌아보고 가시구려 아르르


이내몸 죽었어도 님그려 다시와서

원앙침 베갯머리 속삭인 그말씀을

못잊어 잊지못하여 질펀하게 아르르


내님아 내님이여 날보소 날좀보소

내눈물 흘려흘려 가신님 좇으오니

뒤돌아 다정가득한 손내밀어 주소서


진달래, 성이 진이요 이름은 달래라는 어린 소녀. 아직 봄도 되지 않은 겨울 막바지에 뒷동산의 멧기슭으로 가서 칡을 캐기 시작했다. 산에는 온통 마른 나무와 풀 천지였으나 간간이 겨우내 푸른 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잡풀들이 이제는 지친 듯 쓰러져 있었다.

달래는 손마디가 곱아서 잘 구부러지지도 않는 손가락을 옴지락거리면서 손잡이도 빠지고 날도 무딘데다가 녹까지 잔뜩 슨 괭이로 산비탈 땅을 벅벅 긁으며 칡뿌리를 찾고 있었다. 겨우내 제대로 먹지 못해 그러잖아도 약한 몸이 더욱 야윈 철쭉 아씨에게 달여 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지난가을 하늘 높고 오곡 무르익던 화창한 날에 혼인을 했지만, 첫날밤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신새벽에 인민군에게 끌려간 뒤 열흘 만에 날아든 소식. 뒷동네 심 부자네 머슴으로 있다가 인민군이 내려오자 보위부 선전대원으로 뽑혀나간 쇠돌이가 풀이 잔뜩 죽은 채 가져온 신랑의 사망 소식에 철쭉 아씨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겨우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말라가기만 한 철쭉 아씨는 저 남녘 하늘가에서 오는 희미한 봄기운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왔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빈혈이 극심했던 탓이다. 인민군의 총알받이로 나간 신랑의 전사 소식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 탓도 있지만, 집안의 곡식이나 먹을 것을 인민군이 모두 공출해 갔기에 계집종 달래와 병들어 누워 있는 새댁으로선 어디에서도 쌀 한 톨 제대로 구해 올 수 없어서 굶기를 밥 먹듯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미군과 국방군이 마을에 들어와서는 죽은 신랑이 인민군이었다는 것 때문에 집 대문에다 빨갱이 딱지를 붙여놓아 동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들이 살고 있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는 총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도 인민군과 국방군이 한 차례씩 휩쓸고 지나간 뒤 전쟁보다 더 큰 생채기가 남고 말았다. 일단 마을 청년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한번은 인민군에서 차출해 갔고, 그 다음에 국방군이 마을에 들어와서는 은신처에서 나온 젊은이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게다가 이 두 번의 난리 통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와 파랭이로 나뉘어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것을 넘어 나중에는 곡괭이와 쇠스랑과 낫에다가 도끼까지 들고 서로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은 사람, 여기저기 찔려 반병신 된 사람, 북이 됐든 남이 됐든 저 멀리 알지 못하는 곳으로 줄행랑친 사람 등등으로 인해 어느 한 집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니 철쭉 아씨 집이라고 온전할 수 있겠는가. 세간 등속은 빼앗기거나 부서진 데다 헛간까지 불에 타고 기르던 소와 돼지와 닭까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그런 뒤 어느 누구 한 사람 와서 살펴보지 않아 마치 폐가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런 중에도 달래는 끝까지 남아 철쭉 아씨를 돌보며 간신히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기운이 진해져 가는 철쭉 아씨에게 무엇인가 기운 차릴 것을 먹여주려고 달래가 뒷산 아랫녘으로 간 것이다.

달래가 저녁 어스름, 새끼손가락보다 가는 흙투성이 뿌리 몇 가닥을 들고 집에 돌아가고 있는데 멀리에서 봐도 가슴 철렁한 느낌이 들 정도로 대문이 망가져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구 떨려오는 마음을 억누른 채 급히 뛰어가 보니 자그마한 나무 대문은 누가 발로 걷어찼는지 경첩이 거의 떨어져 나간 채 반쯤 열려 있었고, 그 문 사이로 보이는 안마당에는 무엇인가가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달래가 마당으로 들어서서 살펴보니 그나마 얼마 남아 있지 않았던 세간들이 몽땅 밖으로 나와 부서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철쭉 아씨가 누워 있는 건넌방 창호지 문도 부서지고 찢긴 채 덜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달래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급히 달려가서 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철쭉 아씨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옷까지 거의 벗겨진 채 아랫도리에서는 피까지 흘러나와 있고 머리칼도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달래는 아씨한테 달려가 옷가지와 이불로 급히 몸을 덮어주고 나서 아씨 얼굴을 보니 산 사람이 아니었다. 달래는 너무 놀라 소리치면서 아씨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러자 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아씨의 눈이 살며시 떠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달래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아씨, 아씨,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철쭉 아씨는 새하얗게 된 입술 사이로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 같았다.

달래가 몸을 기울여 자기 귀를 아씨의 입에 갖다댔다.

“베……개…….”

달래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들고 아씨가 늘 베고 자던 베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씨의 눈에 실망스러운 빛이 어리는 듯하면서 어딘지 눈길이 방구석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달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들어 방구석을 보았더니 베개가 놓여 있었다. 아씨가 첫날밤 단 한 번만 베고 잤던 기다란 베개. 두동달이베개. 신랑과 색시가 함께 베고 자는 원앙 베개.

달래가 고개를 다시 돌려 아씨를 보았더니 그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달래는 얼른 몸을 일으켜 그 두동달이베개를 끌어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씨가 눈으로 그 베개를 바라보며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얘진 입술을 씰룩이는 것이었다. 달래는 얼른 자기 귀를 아씨 입에 갖다댔다. 그러나 말소리 대신 신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달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아씨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간절한 눈빛.

하지만 달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쩔쩔매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아씨는 계속 무엇인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딘지 그 두동달이베개 쪽으로 얼굴을 돌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같았다.

달래는 가슴이 답답해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나서 두동달이베개에 손을 대고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아씨의 눈이 다시 밝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달래는 퍼뜩 한 가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얼른 두동달이베개를 더 가까이 끌어오고 나서 아씨의 목 뒤로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레 머리를 든 뒤 천천히 베개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아씨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씨는 눈물 어린 눈동자로 무엇인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달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도 아씨 옆에 몸을 누이며 두동달이베개에 머리를 올렸다. 그 순간 달래의 몸에 닿아 있던 아씨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달래는 깜짝 놀라 한 손으로 아씨의 그 손을 잡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

하지만 아씨의 얼굴빛은 어딘지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아씨가 억지로 입을 열었는지 무슨 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달래는 급히 몸을 일으켜 아씨의 귀에 자기 입술을 갖다댔다.

“……베……개……속…….”

하지만 이 소리는 제대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온 힘을 쥐어짜서 내는 신음 같은 소리. 그런 뒤 무슨 뜻인지 모를 소리도 다 마치지 못하고 아씨의 몸이 축 늘어졌다.

달래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씨의 몸을 약간 흔들었다. 그러자 마치 솜 인형처럼 맥없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달래는 얼른 일어났다. 겁이 더럭 나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두 가지 사실.

하나는 그날 마을의 못된 놈들 여럿이 빨갱이 집을 요절내겠다며 철쭉 아씨의 집에 쳐들어간 것이다. 그리고는 누워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씨를 돌아가면서 겁탈한 뒤 혹시 값나가는 것들이 있는지 찾아내려고 집안 세간을 뒤지고 끌어내고 부수고 해서는 몽땅 훔쳐가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패물을 비롯해서 비싼 금붙이나 집문서와 땅문서 등은 가져가지 못했다.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찾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실. 아씨가 자꾸만 두동달이베개로 시선을 보냈던 것이 생각난 달래는 혹시나 해서 그 배게 속을 열어보았더니……, 그 불량배들이 찾지 못한 온갖 귀한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씨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 모든 것들을 달래에게 준다는 글을 예쁘장한 글씨로, 역시 예쁜 색지에 적어서, 이 역시 아주 조그마하면서도 깜찍하고 예쁜 복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그런 뒤 그해 봄, 진달래와 철쭉이 다른 해보다 일찍 꽃망울을 틔웠는데 얼마나 무성하게 피었는지 온 산이 정말로 불이 붙은 것으로 착각되어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신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특히 철쭉 아씨의 집 뜰에는 누가 심었는지 집 둘레 담의 바깥쪽은 진달래가, 안쪽은 철쭉이 빽빽이 심겨진 채 화려하게 피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그 집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오가는 이마다 집 마당에 진달래꽃과 철쭉꽃을 한 다발씩 던져놓고 갔는데, 그 꽃들은 봄이 다 가도록 시들지 않고 싱싱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끝]



keyword
이전 01화능소화 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