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아님, 치미 맞음
치미(鴟尾)에는 다음의 뜻이 있다.
1) 옛 전각(殿閣)이나 문루(門樓) 등 전통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혀 있는 기와
2) 꿩의 꽁지깃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서 인용]
치(鴟) | 소리개(솔개), 올빼미, 수리부엉이
치문(鴟吻) | 임금이 있는 궁궐의 남문
취와(鷲瓦) | 전통 기와집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장식용으로 얹는 기와, 짙푸른 빛깔의 기와
취두(鷲頭) | 전각이나 문루 따위의 용마루 양 끝에 댄 장식
망새 | 전통 기와집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장식용으로 얹는 기와
전각(殿閣) | 임금이나 왕족이 사는 큰 건물
문루(門樓) | 대궐이나 성 따위의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서 인용]
‘……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한옥 기와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특히 치미(鴟尾) 아래쪽 추녀마루 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잡상(雜像)들의 형상이 독특했다. 치미는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 높이 솟듯이 장식한 기와를 말한다. 취두(鷲頭), 취와(鷲瓦), 치문(鴟吻), 망와(望瓦), 망새, 바래기와 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취(鷲)는 (독)수리, 치(鴟)는 솔개나 올빼미를 나타내며 문(吻)은 입술, 곧 입구를 의미한다. 이는 길상(吉祥)과 벽사(辟邪), 즉 상서로운 것은 맞아들이고 악귀는 물리치기 위해 봉황을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 때는 누미(樓尾)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치미나 치문 외에도 반우(反羽)라 불리기도 한 모양이다. 중국 당나라 후반기 때부터는 화재를 막기 위해 물을 내뿜는 어룡(魚龍) 형태로도 만들어지면서 점차 용의 머리 등으로 발전하여 전통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 때까지는 새나 물고기 꼬리와 같은 모양의 기와를 사용했는데 바로 이것을 치미(鴟尾)라고 하며, 조선시대에 접어들고서는 치미 대신 용머리 형상인 취두(鷲頭)로 바뀌기 시작한 모양이다.’ - 브런치 Rudolf 작가의 장편소설 《보석도둑과 낭만도둑》 중에서
[어처구니]
1) 우리의 옛 민가에서 사용하던 맷돌의 손잡이를 말하며, ‘어이’라고도 한다.
2) 어처구니는 또한 여러 형태의 것들이 모여 있다는 뜻으로도 사용했는데, 잡상(雜像)이라고도 불렀다.
3) 잡상은 궁궐이나 성문 등의 추녀마루에 올려 있는 흙으로 빚은 각종 형상의 조형물을 뜻하기도 한다.
잡상(雜像) | 궁궐의 지붕이나 누각의 지붕 네 귀퉁이에 얹혀놓은 여러 가지 짐승 모양의 돌상
경복궁이나 숭례문을 비롯한 옛 궁궐과 성문의 추녀마루에는 하늘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나란히 줄을 지어 앉아 있는 조그마한 돌상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궁궐이나 전각 또는 성문 등의 추녀마루에 올려놓아 액(厄)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것인데, 흙으로 만들었다 하여 토우(土偶) 또는 ‘잡상’이라고 불렀다.
[위의 사진은 수원 화성행궁 한 전각(殿閣)의 치미와 잡상]
궁궐 정문의 이름에는 공통된 한자를 사용하였는데, 바로 ‘화할 화(化)’자이다.
서울 4대 궁궐의 정문 이름
경복궁 : 광화문
창덕궁 : 돈화문
창경궁 : 홍화문
경희궁 : 흥화문
이들 문에는 임금의 덕으로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되다, 고치다’의 뜻을 지닌 화(化)자를 넣은 것이다. 조선의 임금[臨君]은 백성의 아비요 스승으로서 본이 되고 가르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에 맞춰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고 글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는지는…….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왕궁의 정문이다. 또한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기도 하기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규모도 크고 웅장하며 또한 화려하다.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으며, 1451년(문종 1)과 1506년(연산군 12)에 두 차례 더 개조하여 더욱 웅장하게 만들었다.
또한 궁궐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기에, 그에 걸맞게 동서남북 각소에 동서남북 방위를 상징하는 네 개의 문을 만들었다. 즉 건춘문(동문), 영추문(서문), 광화문(남문), 신무문(북문)이다. 이 중에서 남문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동문 | 동쪽을 상징하는 ‘봄[春]’을 넣어 건춘문(建春門)이라 했다. 경복궁의 동쪽 문으로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서문 |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문무백관이 출입한다고 해서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불린다. 송강 정철(鄭澈,1536~93)이 귀양을 가면서 지은 ‘관동별곡’에 ‘연추문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라는 구절이 있다. (영추문의 추(秋)는 서쪽을 상징하며, 아래의 '관동별곡' 참고.)
남문 | 광화문(光化門)이며, 경복궁의 남문이자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인 동시에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어서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도 크고 격식도 잘 갖추었다.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북문 | 북쪽을 상징하는 ‘굳셀 무(武)’자를 넣어 신무문(神武門)이라 했다.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玄武)’에서 따온 것인데, 음기가 강하다고 해서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었다. 원래 경복궁 건립 당시에는 북문이 없었지만 1433년(세종 15년)에 추가로 건립했다.
아래는 ‘관동별곡’의 일부
강호에 병이깊어 대숲에 누웠더니
강원도 팔백리 너른땅을 맡기시어
아아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연추문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서 옥절을 받아든뒤
평구역 말갈아타고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이 어드메요 치악이 여기로다
소양강 내린물이 어디로 돈단말가
외로이 떠도는몸 흰머리만 느는도다
옥절(玉節) | 관직을 하사받을 때 내리는 증표로, 신패(信牌)나 신표(信標)라고도 한다
고신거국(孤臣去國) | 임금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궁을 떠나는 신하
한편, 창덕궁에서는 서쪽의 담을 서쪽을 상징하는 호랑이[호(虎)], 가을[추(秋)], 쇠[금(金)]를 사용하여 각각 금호문(金虎門), 경추문(景秋門), 요금문(曜金門)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의 사대문은 각각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름을 붙였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한자 그대로 하면 어진 모습을 세우라는 의미여서 봄,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으로 예를 숭상하라는 뜻으로서 여름을 대신하며,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으로 의를 돈독히 하라는 의미에서 가을을 가리키고,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정숙하며 고요하다는 뜻으로 겨울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이 있다.
보신각에서는 새벽 인시(寅時)인 4시에 33번 타종해서 33천이 열리게 했으며, 저녁에는 유시(酉時)인 오후 6시에 28번 타종하는데 이는 밤하늘 별자리 28수(宿)를 나타내는 것이다.
봄을 의미하는 흥인(興仁)은 봄의 기운으로 새롭게 일어서되 스스로를 잘 돌아보라는 뜻.
여름을 뜻하는 숭례(崇禮)는 여름의 풍성함이 분수를 넘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
가을을 의미하는 돈의(敦義)는 가을의 기운으로 말릴 것은 말리고 죽일 것은 죽인다는 뜻.
겨울을 뜻하는 숙정(肅靖)은 겨울의 깊은 잠 속에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의미.
이렇게 서울의 동서남북 사대문은 위치와 계절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를 축약하여 임금과 백성이 모두 하늘 아래 늘 겸양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렇듯 동서남북의 네 문은 자연의 천리(天理)에 거스르지 않고 하늘과 땅의 섭리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의미이다.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 북대문은 각각 바람(風), 불(火), 금속(金), 물(水)을 뜻하며, 이들의 중심이 되는 보신각은 땅(土)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신각은 동서남북의 모든 기운을 조절해 주고, 더욱이 땅에서 소생되는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곳으로서 모든 인간사의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침과 저녁에 타종하여 만물의 생성과 운행을 천하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대문(四大門) 사이에 사소문(四小門)도 세워 백성들의 출입을 도왔다.
북동쪽에는 홍화문(弘化門)을 세웠는데 나중에 혜화문(惠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동소문(東小門)으로도 불린다.
남동쪽에 광희문(光熙門)을 세우고,
남서쪽에는 소덕문(昭德門)을 세웠는데, 나중에 소의문(昭義門)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흔히 서소문(西小門)으로 부른다.
북서쪽에 창의문(彰義門)을 세웠으나, 이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조선의 도성 한성은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해서
동쪽에는 낙산(駱山),
남쪽에는 남산, [남산은 목멱산(木覓山)이라고도 불렸다]
서쪽에는 인왕산(仁旺山) 등 네 개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요새와 같은 곳이다.
근정전에 드나드는 문은 양쪽으로 두 개가 나 있었는데
동문인 일화문(日華門)은 문반(文班)들,
서문인 월화문(月華門)은 무반(武班)들이 출입했다.
조선 시대에 신하들이 궁궐을 드나드는 문을 특별히 지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정조 때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
금호문(金虎門)은 일반 관리,
단봉문(丹鳳門)은 내시,
그리고 정문에서 서북쪽에 있는 요금문(曜金門)과 창경궁 동쪽의 통화문(通化門)은 주로 궁인들이 다녔다고 한다.
갑오경장과 명치유신
한편, 근정전은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 곳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지 4년 만인 1395년에 완공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첫 완공 이후 472년이 지난 1867년에 2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이 시기는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지 4년째로, 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던 때였다.
미국에서는 이 해에 러시아에서 알래스카 땅을 매입하여 국운이 한창 상승하던 시기였으며,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시작된 때이기도 했다.
근정전이 건축되던 1395년 태조 이성계는 그때까지 한양으로 불리던 이름을 한성으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아쉬운 것은 일본의 명치유신이 1867년, 갑오경장이라고도 부르는 조선의 갑오개혁은 1894년부터 시작되어 불과 30년도 안 되는 개방개혁의 차이가 조선말 한국과 일본의 국력 차를 엄청나게 벌려놓았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근대역사에서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위의 내용 중 절반 정도는 브런치 Rudolf 작가의 첫 작품이자 대하 장편소설인 《인희》에서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