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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2. 2023

반쪽가면 괴도

사라진 사파이어 목걸이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센 강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어지는 콩코르드 다리. 안개가 잔뜩 낀 한밤중, 별빛은 물론 보름인데도 달빛은커녕 주변의 가스등 불빛조차 희미해서 주변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상황. 그러나 다리의 남쪽 교각 아래로 살그머니 다가가는 거룻배 하나. 거리에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함 속에서 거룻배 하나가 교각 옆에 붙어서 멈춘다. 그런 뒤 어둠 속에서 재빠르게 교각을 타고 오르는 사내 하나. 반쪽가면 괴도가 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날 밤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의 한 저택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그 집의 주인은 도박벽으로 파산한 귀족 리앵 백작. 그러나 주변에서 인기가 많은 덕에 여러 사람이 도와주고 있어서 아직은 거리로 내몰리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리앵을 짝사랑해서 후원자를 자처하며 그의 빚 일부를 갚아주기까지 한 헝가리 왕족 출신의 늙은 오페라 여가수 미미가 뒤에 있는 덕에 리앵 백작은 아직도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비록 몇 모이지 않는 파티이긴 하지만.

    미미는 이 파티의 단골손님이었는데, 이날은 자잘한 일이 많아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터라 심부름꾼을 통해 미리 파티에 좀 늦게 도착할 것이라 전갈을 보낸 터였다. 그런 뒤 허겁지겁 이인승 마차를 타고 리앵의 파티에 가다가 문득 자신의 휴대용 보석함을 열어보고는 가장 아끼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미미는 그 목걸이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선왕이 가장 아끼는 것이고 또한 왕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어서 그렇기는 하지만, 그 목걸이에는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개된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더군다나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애절한 사연이 담긴 목걸이. 바로 그 목걸이를 빠뜨리고 온 것이다. 게다가 그 목걸이는 그날 밤 그 파티에 꼭 가지고 가야 할 이유도 있었다. 그 이유는 차차 알려드릴 생각이다.

    어떻든 그 목걸이 때문에 급히 이인승 마차를 돌려 집에 다시 돌아갔다가 오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늦었던 것이다. 사실 그 사파이어는 돌아가신 선왕이 미미에게 특별히 선물하며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었던 가보 중 가보였다.      



달도 없는 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어서 지척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든데다가 밤공기도 쌀쌀해서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두꺼운 커튼을 친 주변의 집 창문들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가스램프 불빛과 마차 앞에 달린 촛불 램프로 간신히 길을 밝히면서 마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돌로 포장된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는 그러나 어딘지 위태롭게 보였다. 마부석에 앉은 늙은이는 오늘 특히 더욱 늙어 보였으며, 기침도 자주 하며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좀 전에 미미가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하녀와 함께 집 안에 들어가 보석을 가지고 나올 때 현관 저 바깥쪽에 서 있는 마차의 마부석을 보니 늙은 마부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기침을 해대는 모습이 보였었다. 그러나 미미와 하녀가 다가가자 얼굴을 저쪽으로 돌리며 입을 틀어막고서 잔기침을 서너 번 하더니 고개를 반쯤 숙이고는 말고삐를 쥐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얼마 전부터 마부가 기침을 자주 해서 혹 폐렴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을 미미도 하고 있었던 차였다.

    그러나 오늘 밤 미미는 건강이 몹시 안 좋은 듯한 마부의 뒷모습을 보고 좀 찜찜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모른 척하고 마차에 올랐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 리앵 백작의 저택 쪽으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가 리앵 백작의 저택이 있는 동네 입구에 도착했다. 그 안쪽에는 오래된 나무가 빽빽이 심어져 있는 공원이 있었으며, 그곳을 지나가면 부자와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부촌이 나온다. 하지만 공원은 걸인이나 부랑자들이 늘 차지하고 있어서 대낮에도 그곳을 지나가면 볼썽사나운 장면을 종종 보게 된다. 심지어 부자들의 마차가 지나가면 부랑자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구걸도 하고 욕도 해대곤 해서 공원을 지나가는 그 짧은 거리는 늘 아슬아슬하고도 부담스러웠다. 더군다나 밤에는 그곳에서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탓에 파리 경찰이 아주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물론 이 도로를 우회하는 길이 있긴 하지만 아주 멀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평소 같으면 미미는 이 공원 앞길을 지나가지 않고 저쪽 언덕길을 통해 빙 돌아갔을 텐데, 오늘 밤에는 시간이 꽤 늦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공원 앞 도로를 따라 가스등이 듬성듬성 서 있기는 했지만 짙은 안개로 사방이 부옇게 변해 있어서 주변은 어딘지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가스등 빛이 닿지 않는 주변은 온통 시커멓기만 해서 괴기스러운 분위기까지 더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마차는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하지만 미미는 마음속으로 후회 막급했다. 평소처럼 다른 길로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하면서. 급한 마음에 마부에게 공원 길로 가라고 한 것인데, 막상 이 길로 오고 나니 마음이 불안해진 것이다.

    미미는 하녀에게 보석함을 달라고 했다. 하녀가 가방을 열어서 보석함을 내주자 미미는 그것을 받아 열어서 목걸이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보석함이 그리 크지 않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소매 속에 무엇을 감추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차가 공원길을 거의 빠져나갈 무렵,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툭 튀어나왔다. 늙고 깡마른 사내. 게다가 어딘지 병에 걸린 듯 몸을 비틀거린다. 하지만 그 사내는 말 앞쪽을 가로막고는 마치 자신을 밟고 가라는 듯한 동작을 취한다. 그러면서 기괴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다.

    마부는 말을 몰고 그냥 들이받을 듯이 하다가 얼른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약하게 히힝거리며 발을 멈춘다.

    그러자 사내가 말 옆을 돌아서 마차 앞으로 다가온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동냥하는 시늉을 하면서. 그러자 마부가 남자를 향해 채찍을 크게 휘두르며 겁을 준다. 그래도 사내는 가스등 불빛에 싯누렇다 못해 시커먼 이를 드러내면서 히히덕거리며 비틀비틀, 쓰러질 듯 말듯 아슬아슬한 몸짓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때 마부가 갑자기 마차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원래 천식기가 있었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폐렴으로 번졌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중에도 시커먼 얼굴에 희번덕거리는 눈, 희미한 가스등에 비친 시커멓고 귀신같은 몰골, 반쯤 문드러진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 허청허청 위태위태한 몸짓으로 다가오는 괴물 같은 형상. 게다가 발작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침으로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늙은 마부.



괴물 형상을 한 거지 사내는 드디어 이인승 마차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미미가 앉아 있는 왼쪽 문으로 다가와서 손잡이를 붙잡았다.

    마차 안에서는 시녀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비명을 질렀다. 미미 역시 잔뜩 겁에 질려 안쪽으로 고리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 문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사내는 손잡이를 마구 흔들어대며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마차가 몹시 흔들렸다.

    안에서는 미미가 결사적으로 손잡이를 움켜잡고 버텼다. 시녀까지도 합세해서. 그러나 밖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마구 흔들어대는 탓에 마차 전체가 몹시 흔들렸다. 그러다가 마차가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중에는 마차 문틀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정말로 마차 문틀에서 우지직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미미와 시녀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은 물론 머릿속까지 백지장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드디어 문틀이 우지직 소리가 나더니 문고리 앞쪽에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문이 바깥으로 뜯겨져 나가며 활짝 열리고 말았다. 그런 뒤 야차 같은 사내가 시커먼 손을 불쑥 들이밀고 미미의 몸을 더듬는 것이었다.

    비명!

    미미와 시녀는 몸을 뒤로 빼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시커먼 밤하늘에 울려 퍼져나갔다.

    미미는 본능적으로 소매를 감싸쥐었다. 그러자 사내는 그것을 눈치 챘는지 미미의 소매 옷자락을 움켜쥐고 마구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미미의 소매가 찢어져 나갔다. 그 순간 소매 안에 넣어두었던 보석상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내는 마치 굶주린 야수처럼 그 상자 쪽으로 달려들어 두 손으로 움켜잡는 것이었다. 미미가 두 손으로 사내의 손을 붙잡고 빼앗으려 했지만, 결사적으로 덤비는 사내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사내가 보석상자를 움켜잡고 몸을 돌려 마차에서 떨어지는 순간,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마부가 달려와서 채찍을 휘두른 것이다. 사내는 땅으로 쓰러져 몹시 고통스러운지 몸을 굴렀다. 마부는 사내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해댔다. 그때 사내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한 손으로 마부를 확 밀어젖뜨렸다. 그 바람에 늙은 마부는 땅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내의 손에서 보석상자가 떨어져 나와 땅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몸을 돌이켜 도망갔다.  

    바로 그때 멀리서 요란한 호각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급하게 달려오는 말 발굽소리. 근처를 순찰하던 경관이 달려온 것이다.

    기마경관이 마차로 달려와 사내를 붙잡았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보석상자를 주워서 미미에게 건네주고는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미미와 시녀는 너무 겁에 질려 있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중에도 마부는 말 앞쪽으로 가서 허리를 굽히고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경관이 다가가서 몇몇 가지 물어보려 했지만 하도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바람에 아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그 모습만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이켜 마차 쪽으로 갔다.      


미미는 기마경관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리앵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 저택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몇백 년 전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성과도 같았다.

    저택 안에서 사람들이 달려나와 미미 일행을 맞았다. 그러나 기마경관이 함께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저택 안에 와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그 파티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미미가 밖으로 나와 마부를 찾았지만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반쪽가면 괴도는 콩코르드 다리를 타고 센 강으로 내려와 교각 옆에 매두었던 거룻배에 올라타고서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 시간 리앵 백작의 저택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마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마부는 미미의 저택 헛간에서 밧줄에 꽁꽁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채 발견되었다. 속옷만 입은 상태로. 밧줄을 풀어주고 나서 어찌 된 것인지 물어보니 사연은 이러했다. 즉 그날 저녁 마차가 출발하기 바로 직전 마구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어떤 남자가 나타나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변명하더니 갑자기 덤벼들어 자신의 겉옷을 벗기고는 묶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원에서 난동을 부린 그 사내는 공원이나 숲 여기저기를 빈둥빈둥 어슬렁거리면서 여자나 약한 사람들을 위협해서 금품을 빼앗다가 경관에게 붙들려 흠씬 두들겨 맞곤 하는 거렁뱅이였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다음, 미미가 리앵 백작 저택의 파티에서 선보인 사파이어 목걸이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디선가 바꿔치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누가 바꿔쳤는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뒤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에게도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리앵 백작의 비밀 컬렉션에 아름다운 사파이어 목걸이가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리앵 백작의 비밀금고 속에는 반쪽가면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가리는 검은색 반쪽가면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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