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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l 04. 2023

Eidetic Memory (순간기억)

직관기억, 완전기억 또는 초기억

격투기 선수가 있었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뒤 처음으로 열린 권투 신인 선발전에 나가 준우승했다. 말이 준우승이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목 졸리고, 코피 터지고 그랬던 거다. 그러다가 그냥 열이 팍 올라 상대방 사타구니를 냅다 걷어차 버리는 바람에 반칙패를 했는데, 그래도 준우승이라고 상금을 조금 받긴 했다. 며칠 만에 다 날려버리긴 했지만.

    그런 뒤 얼마 지나서 어떤 남자가 체육관에 찾아와서 그 격투기 대회에 대해 들었다며 아깝다고 했다.    그리고 가능성이 아주 많은 선수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자신이 나서서 아주 큰 길을 열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던 차에 그런 말을 들으니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런 탓에 그만 덥석 물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남자가 던진 미끼를. 그것이 큰 화로 번질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이 격투기 선수의 이름은 진성휘. 성이 진이요, 이름은 성휘다. 그동안 권투와 킥복싱, 태권도, 레슬링, 유도, 주싯수 등등에서 소소한 메달을 딴 것만 빼면 기록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거기에다 이번 선발전에서 준우승하는 바람에 작은 기록 하나가 덧붙여진 것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큰 문제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엄청난 문제가.

    자, 그럼 그 문제라는 게 뭐냐 하면…….      



성휘에게 찾아온 사람은 사채업자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런 사람인지 몰랐다. 아는 사람 소개로 왔다고 하며 격투기를 배우겠다고 하니 고맙고 반갑기만 할 뿐이었다. 사실 격투기 배우겠다고 여기저기에서 연락 오는 사람은 꽤 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겉멋만 들었지 그냥 양아치 같은 애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덜렁덜렁 찾아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도장에서 착실히 하나하나 배울 생각은 안 하고, 그저 길거리에서 불량배 짓거리 할 때 써먹고 폼 잡으려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사람은 좀 달랐다. 우선 자신이 사채업자라고 대놓고 밝히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채업을 하다 보면 떼인 돈을 받아내기 위해 주먹도 좀 필요해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사람이 절름발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다리를 아주 많이 절었는데, 목발은 짚지 않고 왼쪽 다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절뚝절뚝 걷는 것이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고급스러운 콤비 재킷에 화려한 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며, 지팡이는 짚지 않고 그 대신 허리를 굽힌 채 한쪽 손으로 허벅지를 짚으며 걸었다. 보기에는 매우 힘들 것 같았는데, 그것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몸동작이나 표정에는 힘들어 하는 기색이 전혀 없고, 오히려 얼굴에는 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진회색 양복바지의 허벅지를 짚는 왼손가락에는 알이 큼직한 보석반지와 화려한 금색 시계를 차고 있었고, 강한 붉은색과 검은색의 빗살무늬 넥타이에서는 굵고 붉은 보석이 박힌 황금색 넥타이핀이 번쩍거리는 것이었다.

    성휘는 다소 위축이 된 채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머릿속 어디에선가는 경보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상태에서. 격투기를 배우겠다고 하는데,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다. 아, 요즘은 장애인 대신 장애우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만. 아니다. 일전에 어디에선가 들었는데, 장애인에서 장애우로 바뀌었다가 또다시 장애인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마도 장애인 단체에서 항의해서 그리 된 모양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떻든……, 그 멋지고 화려한 장애인 신사분이 격투기를 배우시겠다고?

    돈 많은 부자라니 차라리 경호원을 채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 혹 경호를 맡을 사람을 소개시켜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섣불리 그런 말을 했다간 오히려 실례가 될 것 같아서 멈칫멈칫했더니 오히려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지금은 일단 건강도 좀 챙기고 겸사겸사 격투기도 약간 배우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경호에 필요한 사람을 하나 소개해 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혹 이 체육관 관장, 즉 성휘가 경호를 맡아주면 더욱 좋겠다고 하며, 그렇게 되면 섭섭하지 않게 대우해 주겠다고 한다.

    경호원을 한다……?

    하지만 체육관 관장이 그런 일에 나설 수는 없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것저것 궁금한 게 있었지만, 아직은 그런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아서 필요하면 경호에 알맞은 사람을 연결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기에……? 혹 재벌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사채업자라고 했으니 무슨 뭉텅이 돈 때문에 자기네 업자들끼리 치고받고 하는 싸움이라도 벌이려는 것일까?

    와, 이거 완전히 영화나 드라마인데……!

    호기심 50%, 걱정 25%, 여기에 혹시 돈줄하고 연결되려나 하는 엉뚱한 생각 25%, 도합 100%의 마음으로 성휘는 침을 꿀꺼덕 삼켰다.      

    그 뒤 사채업자는 자리를 절면서도 도장에는 열심히 나와서 운동을 했다. 그러나 장애인에다가 운동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서 모든 것이 느리고 서툴렀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느릿느릿, 그렇지만 차근차근 운동을 하고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쑥 사채업자가 성휘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돈을 좀 많이 굴리는데, 관심 좀 없나?”

    사채업자는 어느 순간부터 성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

    성휘는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우물거리고 말았다.

    “아, 네……, 저…….”

    “그리고 말이야, 사실 이 도장 자리가 시원찮아. 아니 아니, 이 자리가 아니라 건물 말야.”

    “네……? 저……?”

    “여기가 좀 외지긴 하지만, 내가 좀 넉넉히 쳐줄 테니까 이 건물하고 땅 나한테 파는 게 어떨까? 나중에 지하에 체육관 자리 널찍하게 만들어 줄 거고 마.”

    성휘가 눈이 동그래지면서 쳐다보았다.

    “임대가 아니라, 아예 지하상가를 몽땅 분양해 줄 테니까, 그냥 다 팔지 그래.”

    도시개발계획상 녹지에 속해 있는 바람에 신축이나 개축을 하지 못한 채 몇십 년 된 2층짜리 낡은 건물을 수리만 해서 써왔었는데, 그곳에 고층건물을 짓겠다는 것이다.

    성휘는 그동안 나름대로 온갖 곳에 알아보고 민원도 넣고 하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 땅을 녹지에서 풀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그 땅을 팔기만 하면 고층빌딩이 들어서게 하고, 지하상가를 몽땅 주겠다는 것이다.   



이거 혹시 사기 아닐까?

    “에헤, 이 사람……, 내가 여기 유지야. 이곳 시장이나 국회의원도 나하고 고등학교 동문이어서 잘 통한다는 말을 지난번에 해줬지 아마. 이 땅은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풀어. 이 낡은 건물에서 언제까지 도장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가 시장을 만나서 다 얘기해 놨네. 여기 이 쓰레기 땅에 복지센터도 짓고 건물도 올리고 해서 장애자나 저소득층 사람들한테 혜택을 주려고 하는 거야. 이번 기회를 잘 잡아봐. 이거 놓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고. 지금 시에서는 저 복개천 건너에다 복지촌 만들어 주려 한다는 거 잘 알잖아. 그럼 여기는 완전히 밀려서 오래된 건물들은 앞으로 적어도 50년 이상은 개축도 안 되고 신축도 안 돼. 그럼 여기는 빈민촌 쓰레기 되는 거지 뭐. 이번에 기회가 생겼을 때 단안을 내리라고.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 못 해.”

    성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궁리하다가 먼 친척 형님뻘 되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는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형님이 자기가 한번 알아봐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 형님이 성휘를 찾아왔다.

    “그 사람 말이 맞는 것 같아. 벌써 재개발 청사진이 다 나와 있다나 봐. 그런데 그게 두 개래. 하나는 여기 이 부근을 재개발하는 거고, 또 하나는 복개천을 건너면서 바로 시작해서 시영아파트 앞쪽까지 넓은 땅에다 대학도 유치해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만들려는 건가 봐. 그런데 그 자금이 만만치 않아서 윗사람들이 망설이는 것 같아.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잘 판단해. 저 사람들이 지금은 자금이 모자라서 좀 미적거리기는 하지만, 시장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어. 그 사람 발이 무척 넓어서 좀 무리를 하면 자금은 왕창 끌어올 수도 있다나 봐…….”

    성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을 사실 이번에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도 청년회의소에 갔다가 그와 비슷한 말을 어깨 너머로 듣고는 가슴이 철렁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흘 뒤 성휘는 서울에 사는 고등학교 선배한테 가서 의논을 했다.

    “형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저로서는 판단이 안 서네요.”

    “사실 나도 그 얘기를 벌써부터 들어서 알고 있어. 자네가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말야……, 내 생각에는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그 사람들은 뒷배가 좋아서 결국 자기들 원하는 쪽으로 해낼 거야. 그러니까 차라리 못 이기는 척하는 게 어떨까? 그 대신 보상이나 넉넉히 받아내고…….”

    성휘는 사채업자한테 전화를 해서 필요한 서류를 넘기고 도장을 찍겠다고 했다. 그러자 사채업자는 모든 일을 자신한데 맡겨달라고 하면서, 최대한 혜택을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 나서 재개발 사업은 초스피드로 진행되었다.     

    그런 뒤 그 사채업자는 더 이상 도장에 나오지 않았다. 성휘는 걱정이 되어 가끔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하려 했으나, 매번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대신 전화를 받아서 잘 되어가고 있다는 말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뒤 성휘는 TV 저녁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지역 뉴스에서 재개발사업이 갑자기 중단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성휘는 급히 사채업자한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번호가 없는 것이라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성휘는 온갖 곳에 찾아다니며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

    그 사채업자가 그 도시 인근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투자금을 최대한 긁어모아서 외국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성휘의 땅 역시 그 사채업자가 은행에 담보를 잡히고 한도 이상으로 돈을 빼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그 재개발사업은 취소되고 제일 처음에 제시되었던 복개천 너머에 복지촌 만드는 사업이 다시 추진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성휘의 체육관 건물이 있는 곳에는 쓰레기 매립지를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성휘는 며칠 동안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스포츠 가방에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대충 쑤셔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적어놓은 메모를 꺼내보았다. 그것은 사채업자가 처음 체육관에 와서 요란하게 자기 자랑을 하다가 슬쩍 보여준 조그만 명함에서 본 주소였다. 바로 그날 사채업자는 베트남의 한 북부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고급 빌라촌 건설에 자신이 투자를 많이 했다며, 어깨에 힘을 주고 자신이 바로 그 건설회사의 부사장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얼핏 본 명함의 주소.

    평소에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고 늘 자기 자신을 타박하던 성휘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주소만은 머릿속에 남아서 늘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듯 아주 명확하게.      



[메모] Eidetic Memory | ‘Photographic memory’ 또는 ‘eidetic vision’이라고도 하며, 우리말로 하면 직관기억, 완전기억, 초기억, 순간기억 또는 슈퍼메모리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eidetic vision’은 형상직관(形象直觀) 또는 본질직관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LTP(long term potentiation)라고 하는 장기기억증강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직관기억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라고 한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러한 순간기억에 대해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다고 하면, 미래에는 특히 범죄를 예방하고 해결하는 데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것은 환각과는 다르며, 이로 인한 기억은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지속될 수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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