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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4. 2023

전지장조, 그 이후. . .

한여름 밤하늘의 신들이 풀어놓는 이상한 이야기

그러나…….     


전지장조(前地場調)     


한국에는 이몽룡과 성춘향, 서양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하늘에서는 견우와 직녀, 땅에서는 의상대사와 선묘 또는 그대와 내가 있듯이 사랑, 사랑, 사랑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천지일월동서상하 어디에서든지. 이들 중 견우와 직녀는 지상의 사랑이 하늘로 올라가 별들의 전설이 된 이야기이지만, 이와는 달리 처음부터 천상에서 내려온 사랑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외롭고 외롭고 외로운 사랑, 사랑할 대상도 없는 사랑, 바로 그 사랑에서 만물이 태어난 사랑, 그러나 결국엔 변질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이들 사랑은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그리하여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사랑이요, 만인의 생명 대 만인의 생명, 만인의 사랑 대 만인의 사랑, 사랑 대 사랑, 증오 대 증오, 죽음 대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들과 사랑들과 증오들과 역사들……인 셈이기도 하다.

    이토록 뒤죽박죽된 사랑 이야기,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대명사이다. 어느 존재의 이름인 사랑.      



    백설속 천년미인 저홀로 남겨져서

    천만년 긴긴밤을 외로이 지낼터에

    문득이 찾아찾아온 가슴설렌 왕자님     


    아서오 아서시오 상처만 남는사랑

    거두어 가시오서 어차피 못할사랑

    어드메 계시오든지 마음만을 전하오     



위의 시조는 이 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제3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떻든……, 사시사철 허연 연기 내뿜으며 때로는 시뻘건 용암이 흐르기도 하는 활화산. 캄차카 반도의 어느 깊고 깊은 산맥 한 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용의 콧김’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커먼 산. 그곳에서는 수천 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화산이 폭발하여 그 주변 일대는 온통 검은 화산암으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그곳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수천억경 년 전에는 온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산이었던 곳이다. 그때는 천지의 구분도 없었고, 동서남북이나 위아래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시간도 없었고, 생명의 탄생이나 죽음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오직 신들만 유유자적하던 곳.  

    그랬었는데 어느 날……, 아차 그때는 시간의 개념이 없었다고 했지.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뒤섞인 날의 어느 지점……, 시간의 어느 지점 말이다. 시간도 공간의 한 개념 속에 들어가 있었던 그 시절의 어떤 시공간의 한 좌표에서 갑자기 사랑이 탄생했더란 말이다. 뒤죽박죽 사랑이.

    모든 생명에는 탄생 이전에 잉태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간의 개념과는 다르다. 탄생 이전에 존재의 단계가 필요한데, 이는 무존재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생각을 해야만 되는, 그러니까 공(空)의식이 진(眞)의식으로 바뀌면서 그때 발생하는 생(生)의 에너지가 우주에 충만할 때 문득 하나의 의식 또는 인식,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잉태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과정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 존재하던 모든 신들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까마득히 멀고 먼 의식 저기 저 먼 어디에서부터 저절로 존재해 왔던 모든 인식들의 전원일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탄생     


아, 너무 구구했다. 이 긴 설명 대신 그냥 한마디, ‘그렇게 됐다’고만 하면 될 것을.

    아무튼 이렇게 해서 사랑이 우주에 툭 튀어나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사랑 자신도 자기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요즘도 갓난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 자기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 않는가. 바로 그와 같은 상태였다. 그 당시에는.

    하지만 사랑은 힘이 강하다. 친화력도 대단하고. 그러니까 사랑은 태어나자마자 당시 존재하던 모든 신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 쟤 뭐야?

    괜찮은데…….

    한번 가서 볼까?

    이렇게 해서 모든 신들이 몰려와 사랑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딱 하나만 살아남아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말.     


    우주의 시작     



그런데 문제는 사랑에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신들은 모두 너무너무 늙어서 사랑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새하얀 머리칼의 길이는 수천 킬로미터나 되고, 흰 눈썹은 솜사탕을 에베레스트 산처럼 쌓아놓은 것처럼 불뚝 솟아올라 있었으며, 콧수염과 턱수염은……, 아, 이상하게도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흰 눈썹 외에는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냥 맨송맨송한 얼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신들의 모습은 되게 이상했다. 생각해 보라. 허연 머리칼과 흰 눈썹만 무지무지 길게 뒤로 뻗고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고 하는데, 나머지 얼굴은 그냥 밴밴하고 맨송맨송, 이상갸웃했으니까. 하긴 그때의 신들 모습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떻겠는가. 그들한테 장가가고 시집갈 것도 아닌데.  

    어떻든 이러한 신들이 우주라는 것을 만들어 그중 어느 별, 어느 하늘 아래, 어느 곳에다 무턱대고 사랑을 보냈는데, 그곳이 하필 지금의 캄차카 반도 어디께가 되었다는 말이다.      



사랑, 그 이후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커멓게 그을고 불뚝불뚝 솟은 못생긴 바위 산들 사이에서는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리고, 그 주변으로는 시커먼 연기가 뭉술뭉술 피어오르며, 하늘은 늘 두껍고도 새카만 구름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생명체라고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도 단 하나의 세포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지옥 같은 곳에 사랑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슬픈 표정으로.

    홀라당 벗은 사랑은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자기 자신이 벗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물론 자기 표정이 슬프다는 것도 몰랐다. 오직 아는 것은 자신이 사랑이라는 사실 하나. 그런데 문제는 사랑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하나, 늘 마음속에는 어떤 아련하고도 뭉클한 게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잔잔할 때는 몰랐는데 어느 순간 강렬한 분수처럼 솟아오를 때는 가슴이 엄청엄청 아픈 것이었다.

    그런 때는 사랑은 불지옥 같은 화산지대를 마구마구 방황했다. 여기저기에서 용암이 분출하고, 땅은 쩍쩍 갈라지며, 하늘에서는 불비가 쏟아져 내리고, 시커먼 연기와 구름이 뒤덮고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곤 불덩이밖에 없는 혼돈의 지옥.

    그런데 사랑이 지나가는 곳에는 신기하게도 풀잎들이 돋아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살짝 파이는 작은 웅덩이에는 맑은 물이 고이고 있었다. 또한 그 물들은 금방 수증기가 되어 날아오르며 주변의 물체들을 촉촉이 적셔주는 것이다.

    게다가 하늘로 날아오른 수증기들은 이리저리 흩어지면서도 어느 곳에서는 좀더 진해지고 뭉쳐지고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어떠한 형태들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에는 무질서한 듯이 보였지만 차츰차츰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화산지대 곳곳에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밝은 형체가 자리잡더니 이내 전혀 예상치 못한 색과 형태를 가진 것들로 바뀌어 나갔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들은 나중에 꽃이라거나 나무, 새, 나비 등으로 불리게 된 새로운 생명체였다.  

    그와 동시에 물체가 아닌 개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주 만물이 사랑으로 시작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전쟁과 전쟁, 그리고 또 전쟁. . .     


수천억경 년이 지난 뒤 우주는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온통 쌈박질만 하는 곳으로. 은하와 은하의 전쟁, 별들과 별들의 전쟁, 생명체와 생명체의 전쟁, 자연과 자연의 전쟁. 신들과 신들의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었다. 이는 곧 사랑과 사랑의 전쟁인 셈이다. 인간은 사랑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억지해설]

전지장조(前地場調) = 전경색(前景色) = foreground color = 붓이나 연필에 해당

[참고] 배경색(背景色) = background color = 종이나 화면에 해당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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