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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Feb 13. 2023

책문(策問)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책문(策問) |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내 책장은 나름대로는 보물창고라고 자부하고 있다. 거실 전체가 빙 둘러 책장이니까. 책이 많기도 하지만, 내가 아끼는 책들이 많아서 그렇다. 나는 선물할 때 주로 책을 사서 준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같은 책을 여러 권 사둔다. 혹 한 권만 있을 경우 남에게 선물하고 나면 내 손에서는 없어지니까.

    예전에 귀한 분에게 내가 극히 아끼던 책을 선물하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책을 미리 한 권 더 사놓을 걸 하고. 그 뒤 인터넷을 뒤져 간신히 그 책의 헌책을 샀는데, 표지부터 구겨지고 약간 찢어진 데다 본문도 지저분해서 지금도 그 책을 볼 때마다 속상해진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산 책은 거의 모두 비닐 커버를 씌워놓았다. 그리고 햇빛에 바래지지 않게 하려고 낮에는 책장 전체를 천 커버로 씌워놓고 저녁에 벗긴다. 게다가 높이가 45cm가 넘는 대형 책도 많아서 일반 책장에는 꽂을 수 없는 탓에 그에 맞는 책장을 구하는 데도 꽤 애를 먹었다. 그래서 너무 키가 높은 책들은 별도로 받침대를 만들어 그 위 올려놓았더니 의외로 운치(?)가 있어서 보기가 좋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를 종종 가본 덕에 세계 각지의 문화나 사진에 대한 책도 꽤 있고, 도서관에 가서나 볼 법한, 아주 상세하고도 이따만 한 지도책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다. 일단 겉멋으로 사놓고 나서 가끔 뒤져보기만 하는 책도 부지기수다. 또한 그림이나 사진 책도 꽤 많아서, 그런 책들은 눈 호강시키기에 좋아 종종 펼쳐본다.

    얼마 전 헌책방을 뒤지던 중 멋진 책을 한 권 발견했다. 504쪽인데 종이가 두툼해서 책 자체도 꽤 두껍다. 그리고 운이 좋게 새 책 같은 헌책이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제목은 《책문》. 지은이는 김태완. (율곡 선생의 책문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2004년 8월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후루룩, 일단은 그렇게 훑어보았다. 군데군데 정독하기는 했지만. 이곳저곳에 책갈피를 붙여놓고 나중에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설렁설렁 끝까지 가기는 갔다.



이 책의 표지 앞날개에 소개되어 있는 글을 여기에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책문,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 과거에 응시한 수많은 인재들 가운데 최종 33명이 뽑힌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탈락하지 않는다. 다만 등수만 결정될 뿐이다. 이들이 왕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 등수가 가려지는 최종시험이 바로 '책문'이다.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 왕은 절박하게 인재를 원했다. 관건은 그냥 인재가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를 함께 헤쳐나갈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시대의 가장 절박한 물음을 던지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진솔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구한 것이다.     


그대가 재상이라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 조선시대는 왕을 보필하여 덕으로 이끌어가는 재상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대책을 진술하는 선비는 자기 스스로를 재상이라고 가정하고, 자기가 만약 재상이라면 왕을 보필해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갈지를 토론했던 것이다.    


*   


[다음에 이 책의 목차 중 몇 개만 여기에 소개한다.]     

    

책문 |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 광해군

대책 | 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 임숙영     


책문 | 6부의 관리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 명종

대책 | 정치는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 김효원     


책문 |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 세종

대책 | 깃털처럼 보잘것없는 의견도 들으소서 - 이석형     



[이 책 속의 한 구절을 여기에 인용한다.]      


‘책문의 끄트머리에서 걸핏하면 나오는, 죽기를 각오하고 진술한다는 말이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죽음을 각오한 비장함이 들어 있다. 광해군 때 임숙영이라는 선비는 책문에서 당시의 실권자들을 비판했다가 임금이 노하는 바람에 낙방될 뻔했으나, 이항복의 무마로 간신히 병과에 급제한 일이 있다. 물론 낙방과 죽음의 각오는 수준이 다르다. 하지만 사회에 진출하는 문이 과거밖에 없었던 당시에, 선비가 대책의 비판적 내용 때문에 과거에 낙방하고 더구나 권력자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앞으로 평생 사회에 진출할 기회를 봉쇄당하는 치명적인 일일 수도 있다.’(19쪽)      


[마지막으로 1616년, 광해군 8년 증광회시(增廣會試)에 출제된 문제를 소개한다.]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글에 이어지는 출제 지문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113쪽)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아마도 ‘왕이시여, 바로 그대가 정치를 잘못해서 마음이 심란한 것이 아니겠소’가 아닐까? 그러나 수험생들은 선인들의 명 시구(詩句)를 동원해 가며 임금의 마음을 달래준다.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하며, 이를 일명 대비과(大比科)라고도 부른다. 반면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과거시험을 증광회시(增廣會試) 또는 증광시라고 한다. 증광시에는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소과(小科),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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