熱河日記 外典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엉뚱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우선 피서에 대해 알아보겠다.
피서(避暑) | 더위를 피하다. 그 반대는 피한(避寒).
피서를 영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찾아보았더니 재미있게도 ‘summering’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이런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냥 ‘vacation’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 단어 앞에 여름을 나타내는 단어를 넣으면 될 것이고.
피서에도 동양과 서양은 좀 다른 듯하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는 (과거에) 주로 산을 찾았다. 산 속에 들어가 산바람과 나무그늘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주로 바다나 강을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해변이나 강가에 별장을 짓고 휴양을 갔으며, 그림에도 바닷가 풍경이 많이 등장한다. 반면에 동양은 산수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하긴 더위를 피하기만 한다면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뭐가 어떠랴. 요즘도 바캉스 떠나지 않고 집에서 수박과 에어컨으로 즐기는 분들도 많을 테니까.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68세 졸)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의 열하(熱河)까지 다녀온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열하는 허베이 성 동북부 러허(熱河) 강 연안의 도시이며, 지금은 청더(承德)로 불린다. 열하에는 청나라 때 지은 별궁이 있으며, 여름이면 황제가 그곳으로 피서를 갔기에 흔히 피서별궁이나 열하행궁으로 불렸다. 이곳에는 중국 4대 정원 중 하나가 있는데, 그 성벽만 10km나 된다고 하며. 총면적은 5.46제곱km로 16만 평이 넘는다.
박지원은 44세인 정조대왕 4년, 즉 1780년에 8촌 형을 따라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신 축하사절로 열하에 가면서 그 오가는 여행을 세세히 기록했다. 청나라는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서 중국이라는 대국을 다스리기 위해 다양한 민족과 종교 및 문화를 수용해서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박지원은 당시 중국을 통해 다양한 문물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열하일기》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아마 다른 매체나 서적을 통해 모두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17년 동안 중국의 원나라를 비롯해서 각지를 다니면서 기록한 《동방견문록》 이래 《열하일기》처럼 여행기록을 자세히 남긴 책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동방견문록》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너무도 허황된 이야기가 많아서 출간 당시부터 늘 수많은 구설수에 휩싸이고, 그 내용의 진위 여부에 여러 형태로 의문을 받기도 했다. 이에 비하면 《열하일기》의 사실성은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 최대의 상업도시인 베네치아(베니스)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7살 때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당시 세조인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어 17년간 관리로 지내기도 했다. 그때 마르코 폴로는 중국과 그 주변국들을 둘러보고 1292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마르코 폴로는 귀국 후 제노바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붙잡혔는데, 이때 같은 포로인 루스티켈로 다 피사(Rustichello da Pisa)라는 작가에게 자신이 동방에서 경험한 신기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 뒤 포로에서 풀려난 그 작가가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모아 1298년에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펴내게 된 것이다. 그 당시의 제목은 ‘백만 가지 이야기’ 또는 ‘세계 불가사의 책’이었다.
하지만 그 책에는 너무 허황된 내용이 많아 그 여행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심지어 현대의 일부 역사학자들조차도 그 신빙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을 정도다. 그런 탓에 그 책은 마르코 폴로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술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을 정도다.
여기에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글인 ‘도강록’을 소개한다. 그 내용은 물론 한문으로 되어 있기에, 학문과 한문 모두에 무지한 저로서는 번역서의 내용을 조금 손질해서 실을 뿐이다. 글이 어색하거나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은 모두 제 박학의 소치임을 아시고 너무 꾸짖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린다. (아래의 댓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브런치 발검무적 작가님의 고언을 참조하여 위 문장 중 일부의 표현을 고쳤습니다. 제 부족함을 채워주신 발검무적님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15일에 이르는 여정을 신미년(1780년)에서 을유년(1781년)에 걸쳐 기록하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말을 썼는가? 이는 여행의 일정과 날씨가 흐리고 갠 일들을 기록할 때 해(年)를 기준으로 하여 달(月)과 날(日)을 셈하기 위함이다.
그리하면 후(後)는 무슨 뜻인가? 이는 숭정(崇禎)을 기준으로 하여 그 뒤라는 뜻이다.
또한 삼경자(三庚子)는 무슨 뜻인가? 숭정 이후 세 번째 경자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숭정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이는 압록강을 건너게 되니 불가피하게 피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그리하면 왜 피했는가? 강을 건너면 청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다. 온 세상이 모두 청나라 연호를 쓰고 있는데, 나만 굳이 명나라 연호인 숭정을 쓸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대놓고 쓰지도 못할 숭정을 언급한 것인가? 명나라는 중국인 동시에 우리 조선을 처음으로 승인한 이웃 국가라서 그러하다.
명나라 숭정 17년(1644) 의종열(毅宗烈) 황제가 나라를 잃고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숭정 연호를 언급하는 연유는 무엇인가? 청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통치를 한 뒤로 옛 문물과 제도는 모두 오랑캐로 변했어도, 오직 우리만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홀로 옛 문물을 지키며 빛을 발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와 같이 명나라 문화는 아직까지도 압록강 동쪽에서는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비록 힘이 약해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원 땅을 회복하여 옛 영광을 되찾지는 못할망정 숭정을 기억하여 중국을 회복시키고자 함이로다.
숭정 156년 계묘년(1783), 열상외사(洌上外史) 씀
[참고 1] 후삼경자(後三庚子) | 보통은 경자(庚子)를 중심으로 해서 전삼(前三)은 정유(丁酉), 무술(戊戌), 기해(己亥)이며, 후삼(後三)은 신축(辛丑), 임인(壬寅), 계묘(癸卯)라 하는데, 여기에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이후 세 번째 경자년이라는 뜻 같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참고 2] 명나라 숭정제(崇禎帝, 毅宗)가 즉위한 1627년 농민봉기가 발생한 이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이 1644년 3월 베이징을 함락했다. 이때 숭정제는 자결하고, 이로써 명나라는 277년 만에 멸망했다.
[참고 3] 열상외사(洌上外史)는 박지원의 또 다른 호. 박지원은 세 가지 호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연암(燕巖) 외에 연상(煙湘)과 열상외사(洌上外史). 열(洌)은 ‘맑다, 차다’의 뜻이 있다.
[참고 4] 그의 저서에는 과농소초(課農小抄), 과정록(過庭錄), 광문자전(廣文者傳), 민옹전(閔翁傳), 북학파(北學派) 양반전(兩班傳), 연암집(燕巖集), 열하일기(熱河日記),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우상전(虞裳傳), 이용후생(利用厚生)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등이 있다.
[참고 5] 박지원은 집안의 독촉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일부러 낙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49세 때 집안의 권고로 특채에 해당하는 문음(門蔭)으로 출사해서 관리로 나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