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dolf Jun 21.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19)

제5장 | 조각공원 (2)

주원은 꿈에 시달렸다. 평소 거의 꿈을 꾸지 않았는데다, 이렇게 어지러운 꿈을 꾸는 것은 또 아주 드문 일이었다. 무엇엔가 계속 쫓기다가 잠이 깼는데, 잠시 뒤척이다 곧바로 잠이 들었으나 또다시 앞선 꿈이 계속 이어지는 듯 출구 없는 곳으로 몰리며 힘들어하는 그런 꿈이 연속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원은 한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도 좀 어지러웠다.

    왜 이러지……?

    혹 열이 있나 이마를 만져보았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꿈이 뒤숭숭했으나 그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꿈을 꾸었다는 것밖에는.

    주원은 화장실에 다녀와서 화장대 스툴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기미 같은 것은 끼지 않았다. 눈꺼풀이 늘어나 있지도 않았고.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는 주원 자신. 틀림없었다.

    그런데 마음은 왜 이렇게 뒤숭숭하지……?

    똑 똑 똑.

    아버지.

    주원은 스툴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에 손을 대려는데 문이 살그머니 열린다. 아주 살짝. 그리고 그 틈새로 정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주원이 문으로 가서 활짝 열었다.

    정 회장은 벌써 몸이 반은 계단 쪽으로 돌려진 상태였다. 그 자세에서 정 회장은 얼굴을 돌려서 주원을 바라보며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저녁에 보자.”

    정 회장은 그 말만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잘 다녀오세요.

    주원은 소리는 내지 않고 속으로만 말했다.

    정 회장은 계단 중간쯤에서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미소를 보낸다.



침대로 돌아온 주원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두 손을 약간 뒤로 짚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아침 10시가 되었다. 뷰티샵에는 10시 반에 예약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3시에 한번 더 가야 한단다. 하지만 편가의 약속을 지키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

    주원은 외출준비를 갖추었으나 마음의 결정은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시 1분.

    10시 10분에는 결정을 내리자. 그러지 않으면 그대로 뷰티샵으로 가야 한다. 10시 15분에. 뷰티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갑자기 주원 방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남궁 여사. 옷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주원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내려간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에 주원은 방을 나섰다.

    일층 거실 소파를 지나는데 식당에서 남궁 여사가 나온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내며.

    주원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대문으로 갔다. 살며시 연다.

    가슴이 떨려왔다.

    문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길로 나아갔다.

    따각따각.

    급한 걸음으로 걸으면서 택시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찾았다.

    없었다.

    ……?

    주원은 우뚝 멈춰섰다.

    화장대 위.

    주원은 돌아섰다.

    발자국을 떼었다. 그러나 곧 멈추었다.

    망설임.

    하늘 한번 쳐다보고.

    다시 돌아섰다.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걸어갔다.

    

   

주원은 택시에서 내렸다. 주원은 자신이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홍은동 편가의 바디페인팅 사무실 건물 앞. 약속한 시간보다 근 20분이나 늦었다. 사실 길도 좀 막혔다.

    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권도 도장 밴을 가지고 나와서. 편가가 주원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길이 많이 막혔나 봐요? 전화 여러 번 했는데…….”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밴 쪽으로 걸어갔다. 편가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따라온다.

    “무슨 일 있어요?”

    “가요.”

    “왜……?”

    “가자니까!”

    편가가 눈치를 보며 밴의 문을 열어준다. 주원은 아무 말 않고 올라탔다.

    “오늘 일찍 집에 돌아가야 해요. 늦어도 2시 반까지는.”

    “…….”

    편가는 멀뚱한 얼굴로 차문을 닫아주고는 차 앞으로 빙 돌아서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차 뒷좌석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찬 플라스틱 바구니와 커다란 종이상자가 여러 개 실려 있었다. 주원은 고개를 돌려 쓰윽 한번 훑어본 다음 눈을 앞쪽으로 돌렸다.  

    두 사람이 탄 차는 통일로를 통해 일산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편가가 몇 마디 건넸으나 주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도중 편가는 그 조각가에게 전화를 해서 조금 늦을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일산 시내를 지나서 인적이 드문 도로로 접어든 뒤 조금 더 가니 야트막한 산이 나온다. 겨울이라 나무들이 잎을 많이 떨어뜨렸을 텐데도 숲이 제법 깊어 보였다.

    비탈길로 올라가 잠시 달린 뒤 오른쪽으로 꺾어지자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그곳으로 들어가니 좁은 길이 위쪽으로 주욱 이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많던 일산의 높은 아파트들이 보이지 않았다.  

    편가가 핸드폰 지도를 들어다보더니 거의 다 왔다고 말한다.

    주원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해 보니 주변이 컴컴했다.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시들어가는 초겨울 숲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숲속에 들어왔다고 해도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비틀어서 한 뼘 정도만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웬일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했는데 언제 구름이 몰려온 거야. 눈이 오려나…….



12시가 다 되어 별장 앞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길과는 달리 별장 앞은 공터같이 약간 넓게 틔어 있었다.

    편가가 별장이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으나 막상 와보니 대저택이었다.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3층짜리 대저택. 주원의 집보다 두 배 이상 커 보였다.

    건물 전체가 흰색.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널찍한 나무대문 앞의 왼쪽에는 흰색 대리석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Black Blue & Eternal Lif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BB&EL가 저런 뜻이구나. 영원한 삶. 그런데 ‘Black Blue’는? 그냥 검푸른색?

    글쎄…….

    뭐 신경쓸 것 없음.

    편가가 전화를 걸어 도착했다고 말하자 커다란 나무문이 옆으로 스르르 밀려들어간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편가의 설명을 통해 그 저택에 대해서 대강 들었다. 유명한 조각가의 저택 겸 전시회장이라고 했다. 5년 만에 열리는 발표회라고 한다. 주원은 조각가라고 해서 남자인 줄 알았더니 여자란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좀 특이한 모양이다. 일부러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편가 말의 뉘앙스는 그러했다.  

    밴이 정원으로 들어가자 대문이 다시 닫혔다.



저택 전체가 어딘지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초겨울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져서 그런가? 하지만 공기는 맑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저택 둘레의 나무들이 대부분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주원과 편가가 차에서 내리는데 저택 현관문이 열렸다.

    50대로 보이는 키가 자그마한 여자가 나왔다. 아래위 모두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바지도, 스웨터도. 목도리도. 눈은 작으면서도 날카로워 보였다. 어쩐지 조각가라기보다는 학교 교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편가가 현관 쪽으로 다가가는데 여자의 눈은 주원을 향해 있었다.

    주원이 그 눈길을 받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편가가 여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주원을 돌아다본다.

    “저하고 함께 일하는 분입니다.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죠. 전공은 실내디자인입니다만…….”

    편가는 밝은 표정으로 주원 쪽을 돌아다본다.

    “정 실장님, 와서 인사드리세요.”

    주원이 눈가에 핏발을 세우면서도 편가는 외면한 채 그 자리에서 여자를 향해 가능한 한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여전히 주원을 똑바로 바라본다.

    주원은 약간 무안한 느낌이 들어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편가가 주원을 돌아다본다. 주원은 그 눈길을 무시하고 한마디 더 했다.

    “저택이 참 이쁘네요.”

    편가가 끼어든다.

    “명함 좀 드리세요.”

    주원은 편가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면서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뒤지는 척.

    “어머, 안 가져왔네.” 주원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죄송합…….”

    “다음에 오면 드리세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뵈면 그때 드릴게요.”

    주원은 다시 머리를 숙였다.

    여자는 말없이 주원을 계속 바라본다. 탐색이라도 하듯이. 그러더니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편가가 얼른 쫓아가서 현관문을 붙들고 주원을 돌아다본다.

    주원은 편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편가를 스치는 순간 발이 근질근질했다. 그대로 차버리고 싶은 충동.



[다음 이야기]로 계속

작가의 이전글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1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