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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2.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20)

제5장 | 조각정원 (3)

주원은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집 안으로 들어서다가 멈칫하고 우뚝 멈춰섰다.

    휑한 실내.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너른 방.

    그리고 높은 천장.

    거실이 아니라 널따란 홀.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방도 없었고, 칸막이도 없었다. 단지 한쪽 구석에 주방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널찍한 흰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이 있고, 그 뒤에 유리 칸막이 선반장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 옆으로 복도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집 밖에서 본 것보다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거실이 엄청 넓어 보였다. 웬만한 전시회 하나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서양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파티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주방 옆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이 있었는데 그 폭이 웬만한 가정집의 층계보다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 계단은 중간에서 꺾여 이층으로 올라가며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주원이 보기에는 개인저택이라기보다는 소형 전시회장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특이한 점은 조명이었다. 이렇게 넓고 높은 홀에는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으면 제격이겠지만, 특이하게도 천장에서 길게 와이어를 늘어뜨려 금속 반사경 같은 것들을 설치해서 간접조명으로 밝혀놓았던 것이다. 전시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을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층에는 아직 올라가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편가가 들었다는 말에 의하면 리셉션 룸으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활은 3층에서 하는 모양이다.

    편가는 조각가 여자에게 작품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표정이나 말은 없이 얼굴을 주방 옆쪽으로 향한다.

    편가가 그쪽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자 여자가 입을 연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손을 내밀면서.

    “핸드폰 주세요. 얘기 들었을 텐데.”

    편가는 ‘아…….’ 하며 멈칫한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여자에게 주면서 주원을 돌아다보았다.

    여자도 동시에 주원을 쳐다본다.

    “저…….”



주원은 편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는 왜 핸드폰을 내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또 하나는 사실 지금 주원에게는 핸드폰이 없다. 자기 방 화장대에 올려놓고 깜빡 잊은 채 놔두고 온 것이다.

    주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편가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다. 그러면서 편가를 돌아다본다. 힐난하는 듯한 모습. 그러나 말은 없다.

    주원은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주원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편가가 주원에게 다가온다.

    “좀 미안하게 됐는데……, 지하실에 내려가면 선생님 작품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사진 찍을까 봐 그러시는 겁니다. 발표회 전에 기자들에게 공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미리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답니다.”

    주원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거리며 변명하듯이 말하는 편가.

    주원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분한 느낌이 들어 편가를 쏘아보았다.

    “미안해요……. 미리 얘기했어야 하는데…….”

    편가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한다.

    주원은 입을 꼭 다물었다가 여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제가 깜빡 잊고 핸드폰을 집에다 놔두고 왔어요…….”

    죄송합니다……. 이 말이 입에서 나오려 했으나 침을 꼴깍 삼키듯 말을 목구멍 속으로 넘겼다.

    여자가 주원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주원은 입을 다시 꼭 다물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편가.

    주원은 계속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 바라본다.

    몇 초가 흐른 듯, 그러나 마치 영화의 스틸 컷처럼 멈춰선 순간이 지나고 나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여는 듯했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보이지 않을 듯 끄덕인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이층 계단 쪽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원은 여자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편가는 여자와 주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여자가 폭이 넓은 계단을 올라 중간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져 사라지자 편가가 쭈뼛거리며 주원에게 얼굴을 돌린다.

    주원은 편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편가가 얼른 주원 앞으로 나서서 걷는다.

    주방 옆으로 가자 제법 널찍한 복도가 나왔다. 그 왼쪽에는 뒷마당으로 나가는 이중문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일반 가정집과는 달리 남녀 화장실 문이 따로 나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지나 오른쪽 벽에 엘리베이터 문이 보였다. 버튼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도 지하실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같았다. 그리고 그 위에 감시카메라.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대문 옆에도 카메라가 있었던 것 같았다. 현관문에도.

    들어올 때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보았으나 엘리베이터 카메라를 보니 새삼 그런 것들이 생각났다.

    편가가 엘리베이터로 다가가서 버튼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웅 하는 소리도 없었다.

    편가가 여러 번 계속 눌렀으나 역시 엘리베이터는 열리지 않았다.

    편가는 주원을 돌아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널찍한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두 쪽으로 된 문.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감시카메라. 아마도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리라.

    하지만 지하실 문이라고 하기에는 꽤 넓었다. 더군다나 큼직한 잠금장치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마치 은행 지하금고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주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들이 있다고…….

    편가는 감시카메라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지 문으로 다가가서 잠금장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손을 갖다대고 슬쩍 밀었다. 그러자 문이 스르르 안쪽으로 젖혀진다. 자동문처럼 양쪽으로. 그와 동시에 안쪽 복도의 천장에서 불이 켜졌다.

    그 안쪽으로 짧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복도는 문처럼 널찍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폭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편가와 주원은 말없이 복도 끝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에 계단참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인다. 지하가 꽤 깊어 보였다. 계단 천장에는 중간중간에 전등이 있어서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미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된 하나의 문.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감시카메라.

    이번에는 편가도 좀 난감한 듯 주저하며 문을 위아래로 살핀다. 그러자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다. 옆으로. 그러면서 어디선가 약하게 윙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아마도 환기장치가 작동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지하실 천장 한복판에서 LED(발광 다이오드)의 약한 불빛이 저 깊숙이까지 일렬로 주욱 몇 개가 켜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잠깐 멈칫했지만 곧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은 긴장한 채. 마치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비밀과 음모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장면 같았다. 사실 주원은 어딘지 호기심도 일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무엇인가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켜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천장의 희미한 빛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동물들의 윤곽들.     마치 중국 고대 병마용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편가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그 순간 드러난 거대한 무덤.

    벽과 바닥과 천장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불투명 무광의 암흑과 같은 검은색. 휘황한 조명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렸으나 지하실 암흑의 사면으로 빨려들어간 듯 빛은 보이지 않고 오직 태고의 우주공간처럼 무지무념무색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무한대의 죽음 한복판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무덤 속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무덤 속에서 영원한 잠을 자듯 온갖 동물이 투명한 푸른색을 뒤집어쓰고 고요히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거대한 푸른색 사파이어 보석을 수백만 년 동안 갈고 닦아서 동물상들을 만들어놓은 듯했다.   

    그 광경에 압도되어 주원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동물 조각상들의 매끈거리는 표면이 조명을 받아 마치 레이저 반사광을 내뿜듯 신비로운 빛을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태곳적 우주의 신비한 빛들이 암흑의 우주 공간으로 현란하게 방사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든 조각상 아래에는 두툼한 받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조각상과 일체로 붙어 있었다.  

    주원은 온몸이 전율로 떨려오는 듯했다.

    처음에는 암흑의 무덤 같았던 공포감, 그러나 곧 우주의 태초에 빠진 듯한 황홀감에 사로잡혀 주원은 동물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환상과 죽음의 세계. 그래, 맞아, 이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어느 영화나 연극에서도, 또한 어떠한 공연이나 책에서도, 그리고 인간의 어떤 상상에서도 이러한 세계는 창조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온갖 동물들의 맑고 밝고 투명한 푸른색 표면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눈부신 빛들이 불투명 암흑의 세계로 빨려들어가 영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 사냥개, 리트리버, 말, 돼지, 고양이, 삵, 멧돼지, 여우, 코끼리, 사슴, 양, 염소, 송아지, 어린 낙타, 어린 기린, 이밖에 주원이 알 듯 말 듯한 여러 동물들…….

    게다가 이러한 모든 동물들에게서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활력감이 느껴졌다. 주원과 편가가 빛을 쏟아주는 동시에 억겁의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모습들.

    아…….

    주원은 벅찬 마음으로 동물들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황홀과 생명감을 맛보며.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느껴졌다.

    이들 푸른색 조각 동물들의 안구는 모두 검은색이었던 것이다. 몸체는 투명한 푸른색이었는데, 눈만은 불투명한 검은색이었다. 어딘지 부조화 같은 느낌. 그 검은색은 사방의 벽을 칠한 바로 그 불투명이었다. 불투명의 검은 사면과 투명의 푸른 조각상들이 죽음과 영원 같은 조화로 연결된 반면, 투명의 푸른 동물과 불투명의 검은 눈은 불협화음이었다.

    주원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바이올린 활이 삐익하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 순간 주원의 맥박이 빨라졌다.

    지하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어딘지 불길한 촉감이 만져지는 듯했다.

    그러나 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마 너무도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광경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주원은 심호흡을 한 뒤 동물조각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푸른색 환상들 사이로 우주를 유영하듯 미끄러져 다니던 주원은 한 조각상에서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사람.

    다른 조각상들은 모두 동물인데, 오직 이것 하나만 사람이었다.

    “…….”

    생동감 넘치는 모습. 마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 같았다.

    게다가 소녀.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치마가 찰랑찰랑 흔들리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 윗도리는 목에 물결모양의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인데, 어깨 아래 위팔에서 약간 부풀려진 채 끝이 나 있다. 블라우스 레이스 아래 목 부분에는 가느다란 리본 모양의 매듭. 그 아래로 허리까지 단추가 여러 개 나 있다. 팔과 다리는 가늘고 맨살. 발에는 목이 짧은 양말과 옛 유럽풍의 끈 매는 두툼한 구두가 신겨 있고.

    그리고 소녀는 가는 팔을 들어올려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긴 고수머리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인 채. 그러나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

    르네상스풍의 조각상 같은 모습.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점. 눈이 흰색이었다. 동물 조각상의 눈과 같은 불투명이 아니라 투명의 흰색. 동물 조각상과는 정반대다.

    여기에서 또 하나 색다른 점.

    소녀의 조각상 아래에 붙은 두툼한 받침대에는 보면대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종이 악보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바이올린과 활이 놓여 있었는데, 악보를 포함해서 이들은 모두 조각이 아니라 실제의 것이었다.



주원은 그 조각상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생동감 있게 표현된 조각상이었기 때문이다. 받침대에 놓인 바이올린을 조각상 소녀의 손에 쥐어주면 당장에라도 활을 당겨 고운 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주원이 지하실에 들어와 지금껏 우주적 환상과 영원한 죽음을 경험했다면, 이 소녀상은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현실적 생명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상들이 마치 고대의 거대한 지하무덤에서 나온 테라코타와 같은 정적인 형태였다면, 이 소녀는 누군가가 손을 대주면 곧바로 살아나서 움직일 것만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다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른 모든 동물 조각상의 받침대에는 ‘BB&EL-20’이라는 글자 뒤에 각각 ‘-01, -02, -03’과 같은 식으로 숫자가 붙어 있었으나, 소녀의 받침대에는 숫자 대신 ‘-Revival’이라고 되어 있었다.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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