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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4.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21)

제5장 | 조각공원 (4)

Revival. 부활. 사실 작품 제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주관적으로 붙이는 것이어서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데도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의 조각상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어딘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부활이라면 죽음에서 다시 일어섰다는 것인데, 무엇으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일까?

    EL,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

    동물 조각상들은 고대 무덤 속의 테라코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무덤 속에서 영원히 잠자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고대 무덤들에서는 주로 왕이나 귀족이었다.

    혹, 이 지하실에 있는 모든 동물상은 이 소녀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시립한 존재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 소녀는 이 무덤 속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뜻이고?

    주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소녀밖에는 인간상이 없다.

    조각가는 이 무덤에서 소녀가 부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원히 잠자기를 바라는 것일까?

    주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

    이 지하실 장면에 어울리는 곡이다. 슈베르트가 쓴 15곡의 현악4중주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정식 제목은 현악4중주 14번 d단조. 슈베르트가 27살에 2년에 걸쳐서 완성했다. 죽음에 저항하는 소녀와 그 소녀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유혹하는 죽음의 사자 사이의 대화. 죽음이 주는 안락함. 그곳으로 이끌어 가려는 유혹. 그에 대해 소녀는 저항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이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녹아 흐른다. 슈베르트는 시인 마티아스 크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 1740~1815)의 시 ‘죽음과 소녀’로 이 가곡을 만들었다. 한편, 이 시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제자인 에곤 실레(Egon Shielie)나 한스 발둥(Hans Baldung) 등의 화가들이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을 그려서 남긴 바 있다.     



    [Das Mädchen]

    Vorüber! ach, vorüber!

    Geh, wilder Knochenmann!

    Ich bin noch jung, geh, Lieber!

    Und ruhre mich nicht an.


    [소 녀]

    저리 가세요!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무서운 죽음아!

    나는 아직 어리답니다, 제발!

    나에게 손대지 마세요.     



    [Der Tod]

    Gib deine Hand, du schön und zart Gebild,

    Bin Freund und komme nicht zu strafen.

    Sei gutes Muts! Ich bin nicht wild,

    Sollst sanft in meinen Armen schlafen.


    [죽 음]

    내게 손을 주렴, 아름답고 순진한 아가씨.

    나는 친구야. 네게 벌을 주러 온 것이 아니란다.

    힘을 내! 나는 무섭지 않아.     

    내 품에서 편히 잠들게 해줄게.     



지금까지 느꼈던 생명력은 사라지고 어딘지 갑자기 음산스러워졌다.

    주원은 혼란스러웠다.

    조각가는 이들 조각상을 통해 죽음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꿈꾼 것인가?

    둘 다……?

    그러나 어딘지 모순되는 느낌이었다.

    주원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주원은 허리를 굽혀 조각상의 받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른 동물상의 받침대보다는 다소 두툼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어떤 선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주원은 주저앉다시피 해서 선들을 세밀히 살폈다. 그 선들이 받침대 주변 전체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선들을 좇아 조각상을 돌다보니 한 가지 사실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다.

    관.

    그렇다. 조각가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스스로만 알 수 있게 아주 가는 선 몇 개를 받침대 주변에 두름으로써 관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리라.  

    문득 어느 구절이 떠올랐다.

    아무리 머리 좋은 범죄자라도 완전범죄를 꾸밀 때 한 가지 단서는 남겨놓는다고 한 말. 소설에서 읽었는지 영화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말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 순간 주원의 머리에서 그 말이 저절로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영악한 범죄자일수록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주원은 벌떡 일어났다. 그때 편가가 나타났다.

    “거기에서 뭐해요? 대강 살펴보고 올라가야 해요. 우리는 작품들 개수와 크기 정도만 파악하면 되니까 여기 오래 있을 필요 없어요.”

    “이리 좀 와보세요.”

    주원은 편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여기 와서 이것 좀 봐요.”

    편가가 의아한 얼굴로 주원을 바라본다.

    “여기 이 선들…….”

    편가가 허리를 굽히고 선들을 보았다. 그러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 선들을 주욱 따라가 보세요.”



편가는 주원의 말대로 소녀의 받침대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어 주원을 바라본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편가는 허리를 펴면서 대답한다.

    “바이올린 말하는 거예요?”

    “정말 모르겠어요?”

    편가는 맹한 얼굴로 주원을 바라본다. 편가 역시 이 무덤 속을 돌며 정신이 빠진 상태인 것 같았다.  

    “뭐 별로…….”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이 지하실 자체가 정상이 아닌데…….”

    주원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장 한가운데에서 반원형의 CCTV 카메라가 보였다. 그것 하나 외에 다른 것은 없는 듯했다.

    주원은 카메라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편가에게 고갯짓으로 카메라를 가리켰다.

    편가가 천장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끝이다.

     ‘이 집 안 여기저기 있는 건데, 뭐……’ 하는 눈치다.

    “이거 관이에요.”

    주원이 받침대를 내려다보며 말을 했다.

     “…….”

    여전히 맹한 편가의 표정.

    “여기 아무래도 이상해요. 이 동물상 받침대들도 어쩐지 느낌이 안 좋고……. 이 소녀상 받침대는 더더욱 수상해요. 이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이젠 올라가죠. 올라가서 얘기해요. 여기 오래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편가가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주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주원은 짧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주원은 몇 번 소녀 조각상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문 앞에 섰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편가가 문 옆에 길게 붙어 있는 버튼을 눌렀다. 열리지 않았다.

    편가가 손으로 문을 몇 번 두드렸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편가는 뒤로 돌아서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아서며 주먹으로 문을 쾅 쳤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편가는 문에서 뒤로 좀 물러난 뒤 발바닥으로 힘껏 찼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편가가 이번에는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그리고는 뛰다시피 다가가서 몸으로 부딪쳤다. 꽝 하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주원은 겁이 났다.

    편가가 주원을 돌아다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원에게 좀 물러서라는 몸짓을 한다.

    주원은 문 옆에서 조금 떨어져서 편가를 바라보며 섰다.

    편가가 아주 멀찌감치로 물러선다. 10미터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편가는 그곳에서 문으로 달려가더니 몸 옆으로 아주 강하게 부딪쳤다.

    콰앙!

    문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편가는 돌아섰다. 그리고 지하실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찾는 모양이다. 그러더니 지하실 끝 쪽에 가서 두툼한 나무 몽둥이를 하나 주워왔다. 지하실 안에는 여러 잡다한 것들이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편가는 그 몽둥이를 들고 카메라 아래로 갔다. 그리고는 야구방망이처럼 몇 번 휘두른다. 카메라에게 보라는 듯이. 그 다음 주먹을 쥐고 카메라 쪽으로 내밀었다.

    그런 뒤에 다시 문으로 갔다. 열리지 않았다. 버튼을 눌렀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편가는 몽둥이로 문을 가볍게 몇 번 쳤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인다.

    볼펜과 메모장을 꺼냈다. 메모를 하기 위해 가지고 온 것 같았다.

    편가는 메모지에 볼펜으로 무엇인가를 썼다. 그런 뒤 주원에게 보여준다.

    ‘문 열어! 안 열면 조각 작품들을 다 부숴버린다!’

    편가는 메모지를 가지고 카메라 아래로 갔다. 팔을 쭉 뻗어 메모지를 카메라 쪽으로 갖다댔다. 그러더니 몇 번 흔든다. 그리고는 또다시 팔을 멈추고 가만히 종이를 갖다댄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다가 편가는 팔을 내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편가는 화가 나서 몽둥이를 들고 카메라 아래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당장에라도 조각상을 내리칠 듯이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주원이 그때 편가에게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 봐요.”

    주원은 달래듯이 말하고는 소녀상으로 갔다. 그리고는 바이올린과 활을 집어들었다.

    “뭐하는 거예요?”

    편가가 묻는다.

    그러나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원은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런 다음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편가가 뜨악한 표정으로 주원을 바라보고 다시 카메라를 쳐다보고 한다.

    주원은 어쩌면 이 지하실에 마이크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서.

    주원은 바이올린을 턱에 갖다댔다. 그리고 활을 현 위에 올려놓았다.

    주원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나서 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시작부터 강하게 터져나오는 힘찬 선율.



주원은 ‘죽음과 소녀’의 네 악장 중 가장 짧은 제4악장 프레스토(presto, 빠르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 시간은 3분 조금 더 걸린다.

    4악장은 고전파 론도 소나타(Rondo Sonata) 형식의 타란텔라로서 8분의 6박자의 빠른 춤곡이다. 죽음의 무도와 같은 현란한 음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타란텔라는 원래 이탈리아 나폴리 지방의 빠른 춤곡을 말한다. 타란텔라 독거미에 물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춤.

    또한 현악4중주는 네 악기로 이루어져 있다.

    제1바이올린은 전체 주제를 이끌어가며 시종일관 중심을 잡아나간다.

    제2바이올린은 곡 전체를 조화시켜 주는 다정한 친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비올라는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발랄한 소녀와 같다.

    첼로는 이들 모두를 아우르고 화합케 해주는 조정자.   

    주원은 제1바이올린의 음을 청과 흑으로 구분된 생명과 죽음의 공간에 발산하고 있었다. 강하면서도 격렬하고 어지럽게 흔들리는 선율.

     잠시 약해지는 듯하다가도 프레스토로 도는 무희가 원심력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또다시 더 강한 프레스토로 돌아오는 음률.

    현악4중주는 현악 연주 중 가장 어렵다고 한다. 이것을 주원은 제1바이올린 하나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며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어린 영혼.

    두 손을 내저으며 죽음을 막는다. 거부한다. 그때 갑자기 폭발하듯이 커지는 포르테.

    마음이 산란해진다. 압박.

    그러나 소녀는 계속 춤을 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다가와 포옹하며 입맞춤한다.

    끊임없이, 호흡이 다할 때까지 돌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의 공포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즐겨야 한다. 그리하여 4악장은 오히려 생기발랄하고 경쾌하며 심지어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화려한 무도회도 이제 막바지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춤은 끝나면 안 된다.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영속적으로……. 그래서 조각가는 소녀상 앞에 ‘죽음과 소녀’의 악보를 펴놓았던 것이다.

    죽음의 달콤한 유혹.

    소녀의 완강한 거부.

    죽음이 끊임없이 다가오며 압박을 가한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주원은 지금 죽음을 보고 있다. 주원 앞에서 버티고 서 있는 검은 망토. 죽음이 손을 내민다. 주원은 활을 강하게 당겼다. 더 강하게, 더 빨리!

    죽음이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동작.

    죽음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망토 두건 속에 숨겨진 죽음의 얼굴. 그것은 오직 암흑의 색일 뿐이다.

    주원은 죽음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팔을 더 빨리 놀려 죽음을 물리치려 했다.

    주원이 활을 느슨하게 당기면 곧바로 다가오는 죽음.

    몸을 앞으로 내밀며 활을 힘차게 당기면 죽음은 화들짝 놀란 듯 펄쩍 뒤로 물러난다.

    이렇게 죽음과 소녀는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끝이 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소녀야, 힘을 내!

    주원은 활로 소리를 질렀다.

    힘!

    활을 저 끝에서부터 이쪽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소녀가 일어선다. 팔을 휘젖는다. 몸을 돌이키려 한다. 죽음이 손을 뻗어 소녀의 어깨를 잡으려 한다.

    그러나 이제 이들 둘 사이의 전투를 종식시켜야 한다. 이 지하의 무덤에서.

    주원은 또다시 활을 잡아당겼다. 힘차게! 강하게!

    소녀야……!

    주원은 활을 떼고 팔을 내려뜨렸다. 이마에서 땀이 솟았다. 에어컨이 나오는 지하실에서.

    편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서는 아무런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정신 외에는.

    주원은 바이올린을 어깨에서 내리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



주원은 잠시 그러고 있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의 턱받침을 소녀의 턱에 끼우고 바이올린의 목을 왼손 위에 올려놓았다. 꼭 맞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 다음 활대 끝을 오른손에 집어넣었다. 정확하게 들어갔다. 활털이 현 위로 가도록 조절하자 이것도 그대로 맞았다.

    주원은 소녀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쳐다보았다. 완벽한 모습이었다.

    방금 끝난 연주는 소녀가 한 것이다. 조각상 소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소녀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죽음과 한바탕 전투를 치른 소녀.

    소녀가 이겼다.

    주원은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편가를 바라본 뒤 내려놓았던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문이 스르르 열린다. 그와 동시에 계단 천장의 불이 켜졌다.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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