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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6.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23)

제5장 | 조각정원(6)

주원과 편가는 영원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 거의 동시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고개‘들’을 들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 그 순간은 그들이 지금껏 살아온 중에서 선택한 가장 큰 도박이었을 것이다. 생사의 도박.

    그들이 고개‘들’을 드는 순간 총구가 눈앞에서 겨눠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두 사람에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쓸 만한 진정한 용기가 있었던가?

    아니면 만용만이 그들이 이 찰나에 거머쥘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들은 신의 은총을 받은 선택된 인간이었던가?

    각설하고, 겨울바람이 잔가지에 남아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시든 나뭇잎들 스치는 소리 외에는 버러지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산등성이에서 억겁 같은 시간을 보낸 주원과 편가는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고개‘들’을 든 찰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덕 위에서 다가오던 추적자는 소리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편가가 먼저 몸을 살짝 일으켰다. 고된 운동과 생존의 법칙으로 단련된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위험이 물러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하더라도 철저한 경계는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편가는 매처럼 눈을 날카롭게 뜨고서 나뭇가지 사이는 물론 바람결 너머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적이 퇴각했다고.

    편가는 살금살금 언덕 위로 올라갔다. 주위를 살폈다. 저택 쪽을 훑어보았다. 언덕 너머 아래는 물론 신천지처럼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아파트촌까지 둘러보았다.

    안전하다고 편가는 판단했다. 편가는 주원이 아직도 쭈그리고 앉아 있는 곳으로 살며시 다가가서 소리는 나지 않게 입 모양과 손으로 일어나라고 신호를 보냈다.

    주원은 굳어서 펴지지 않을 것 같은 다리에 조금씩 힘을 주어가며 나무둥치를 붙잡고 일어섰다. 완전히 일어서서 허리를 펴기까지 또다시 하세월을 보낸 느낌이다.

    편가가 다가와서 주원에게 손을 내민다.

    주원은 그 손을 붙잡고 몸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깨달은 듯 편가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줄 알아?

    괜히 부아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다. 마음속으로 분한 마음 꾹 눌러놓고 주원은 비탈 위로 발을 조심스레 옮겼다.



두 사람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도 나무가 무성하긴 마찬가지다. 나뭇가지들이. 편가가 했듯이 주원도 언덕 위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두루 바라보며 위험의 기미가 없는지 살폈다. 하지만 그런 방면에는 주원보다 편가가 더 예민할 것이라 생각하고 편가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편가는 왼쪽 저택과 오른쪽 비탈 사이의 산등성이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걸어가자 맨 바위들이 나타났다. 키 낮은 관목 몇이 바위틈에서 빈 가지만 내밀고 있을 뿐 탁 트인 공간이었다.

    편가는 주원에게 멈춰서라는 표시를 한 뒤 바위 가까이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섣불리 바위 위에 올라섰다가는 적의 눈에 완벽한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다시 숨죽이는 시간.  

    편가가 자신의 잠자는 본능을 깨워서 정찰하고 평가하고 결론 내린 뒤 몸을 웅크리며 바위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좌우를 한번 더 살폈다.

    안전하다.

    편가는 주원 쪽으로 손짓을 했다. 주원 역시 몸을 낮추고 조심조심 바위로 다가간다. 편가가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수없었다.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저택 뒷산이지만 동네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 손을 많이 타지 않아서 그런지 숲길은 자연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바위를 조심스레 타고 넘어가서 다시 산등성이로 들어섰다. 그러나 나무들이 별로 없어 은폐하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그러해도 나무숲으로 들어가 헤매는 것보다는 낫다고 두 사람은 무언중에 합의를 보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조금 나아가자 비탈이 나왔다. 그곳부터는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두 사람은 계속 걸어 내려가면서도 간간이 뒤를 돌아보거나 주위를 살피느라 종종 멈춰서곤 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위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주원은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에 편가는 서둘러서 내려가려고 무언중에 주원을 재촉하고 있었다.

    숲을 거의 빠져나온 것 같았다. 왼쪽 저만치에서 저택 일부가 보였다. 그리고 조금 앞에 철조망이 쳐진 것이 눈에 띄었다. 경고판이나 팻말 같은 것도 보였다. 뒷면이어서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산불조심이라든지 진입금지 같은 경고 내용이리라. 이 숲으로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았는지 빈 병이나 버려진 비닐봉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관리를 잘 했는지, 아니면 시민의식이 높아서 무단침입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시민의식을 깨뜨린 두 사람이 조심조심 다소 경사가 급해진 숲길을 다른 쪽으로 돌아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간 뒤 편가가 이리저리 길을 살피더니 한쪽 발을 내디뎌 본다. 비탈이 아주 가팔랐다. 편가가 주원을 돌아다본다. 편가 혼자라면 너끈히 내려가겠지만 주원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주원도 그 급한 비탈을 바라보며 걱정이 앞서서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편가는 먼저 비탈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지는 않았지만 높은 축대가 있어서 사람이 올라오거나 내려가기 힘들어 보였다. 그 축대는 편가로서도 뛰어내리기 힘든 높이였다.

    편가는 축대 꼭대기까지 조심조심 내려가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비탈 중간까지 올라왔다.

    그리고는 주원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며 나직이 말을 한다.

    “이리로 내려오세요. 조심해서.”

    주원은 머뭇거렸다. 가파른 비탈도 무서운데, 그 밑의 축대 아래로 보이는 산길이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같이 보였던 것이다.

    편가가 다시 손짓한다.

    주원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나뭇가지들이 엉켜 있는 숲. 그 속은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 저 너머에서 여자가 총을 쑥 내밀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주원은 갑자기 소름이 쫘악 끼쳤다. 목과 등으로 한기가 내리뻗는 듯했다.

    주원은 고개를 돌려 편가를 내려다보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편가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편가가 비탈 중간에서 손을 내밀고 기다린다.

    주원은 가방을 앞으로 돌려메고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뒤로 짚으며 엉덩이를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쪽으로. 낙엽들이 발에 쓸려내려가거나 엉덩이가 살짝 미끄러지기만 해도 주원은 정신이 혼비백산해졌다. 그때마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입속에서 삼키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갑자기 엉덩이가 미끄러졌다. 순식간이었다. 몸이 벌렁 뒤로 넘어가며 몸이 주욱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엄마…….

    주원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밑에서 편가가 두 손으로 받았다. 하지만 미끄러져 내려오는 힘에 밀려 편가도 함께 뒤로 밀렸다.

편가는 다리를 쫘악 벌렸다. 왼쪽 다리가 아래로 밀리는 중에 오른쪽 다리가 한 나무에 걸렸다. 그 바람에 몸이 왼쪽으로 밀리며 회전한다. 두 손으로는 주원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몸의 자세가 한쪽으로 쏠려 내려가는 바람에 한 손을 놓치고 말았다.



아악―!

    주원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편가 옆을 지나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 아래는 축대 꼭대기였는데, 그곳에서 아래로 튕겨나가 떨어지면 거친 돌멩이가 나뒹구는 버려진 길이었다.

    편가는 있는 힘을 다해 주원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주원의 몸이 아래로 쏠려 내려가는 속도를 못 이겨 손이 미끄러졌다. 편가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안 돼!

    편가의 미끄러지던 손이 주원의 왼쪽 발목에 가서 걸렸다.

    편가는 그곳을 꽉 움켜쥐었다.

    주원의 몸이 반 바퀴 회전하며 머리가 아래로 쏠리면서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다.

    편가는 자신이 죽기로 했다. 죽을 힘을 다해 그 발목을 붙잡고 놓지 않은 것이다.

    출렁!

    그 순간 편가는 물론 주원의 몸이 한번 크게 흔들리더니 두 사람이 한 줄로 늘어진 채 멈춰졌다. 편가의 오른 다리 무릎은 겨울나무 밑동에 꺾인 채 걸려 있었고, 몸은 거의 뒤로 젖혀진 채 왼손으로는 주원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주원은 머리가 비탈 아래로 쏠린 채 두 팔은 양옆으로 벌어져 있고 왼 발목이 편가 손에 잡힌 채 구름낀 시커먼 하늘을 바라보고 낙엽 사이에 벌러덩 누워 있는 모습이 되었다.

    “괜찮아요, 주원 씨?”

    편가가 숨을 크게 내쉬며 물었다.

    “나……, 나 어떻게 된 거예요……?”

    주원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 아래 뭐 붙잡을 거 없어요? 옆에 뭐가 있나 살펴보세요.”

    편가가 목을 돌려 아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주원은 상하가 뒤바뀐 풍경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깐만요……. 여기 나무가 있는데…….”

    주원이 손을 더듬어 가는 나무줄기 하나를 붙잡았다.

    “됐어요. 잡았어요.”

    “조심해서 붙잡고 몸을 돌려봐요. 내가 발목을 놓을 테니까 아주 천천히……, 조심…….”

    주원은 상체를 조심스럽게 돌리면서 그 나무를 꼭 붙잡고 몸의 균형을 잡았다.

    “아직 손 놓지 마세요. 내가 나무를 꽉 잡은 뒤……”

    주원은 상체를 들어올리고서 옆으로 비틀어 다른 팔을 뻗어 두 손으로 나무를 움켜잡았다.

    “됐어요. 손 놔도 돼요.”

    편가는 조심스럽게 주원의 발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아주 천천히.

    됐다.

    주원은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았다.



주원은 나무를 붙잡은 채 몸을 완전히 돌려서 자세가 안정되었다.

    편가도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고서 미끄러지듯이 주원 옆으로 내려왔다.

    “다친 데 없어요?”

    편가가 물었다.

    “몰라요. 옷이 찢어진 것 같아……. 등 쪽이. 겨드랑이도…….”

    편가가 옷을 살폈다.

    “조금 찢어졌네. 두 군데. 그래도 괜찮아요. 몸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지금은.”

    “다행이에요. 자, 그럼 조심해서 발을 딛고 몸을 일으켜 봐요. 내 손 잡고.”

    두 사람은 조심조심 엉거주춤 일어나 앉아서 옷에 묻은 검불들을 털어냈다.

    주원은 가방이 괜찮은지 살펴보고는 다시 고쳐맸다.

    편가는 주원의 머리칼에 붙은 낙엽들을 떼어주려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고개를 피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머리를 더듬으며 나뭇잎이나 마른 풀들을 떼어냈다.

    그러더니 주원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내 꼴이 이게 뭐야……?

    주원은 그러나 말은 하지 않고 편가를 외면한 채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가파른 비탈, 약간 떨어진 곳이 축대 끝,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거친 산길.

    주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편가가 몸을 낮추고 옆으로 서서 조심조심 축대 쪽으로 내려갔다. 편가의 뒷모습을 보니 가관이었다. 윗도리와 바지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터진 데다가 검불도 마구 붙어 있었다.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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