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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7.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24)

제5장 | 조각정원 (7)

편가는 축대 위로 가서 주저앉아 아래를 살펴본다. 그러더니 바로 아래가 아니라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편가가 뒤돌아보며 주원에게 손짓을 하면서 말을 한다.

    “몸 낮춰서 살살 내려와 봐요.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손으로 땅을 짚고서 내려오세요. 조심조심.”

    편가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손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면서 몸동작 흉내까지 내며 설명한다. 몸을 이렇게 저렇게……, 발은 요렇게 내밀고 조렇게 오므려서…….

    주원은 편가의 말을 들으면서 간신히 축대 위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바로 밑은 보지 않았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편가가 축대의 약간 왼쪽으로 떨어진 곳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다시 말을 했다.

    “저기, 저 중간쯤에 플라스틱 파이프 같은 것이 삐죽 나와 있는 거 보이죠? 그 옆에 벽돌 같은 거 톡 튀어나와 있는 것하고. 그리고 그 아래에 나무막대 여러 개가 축대 사이에서 나와 있죠? 저거 아마 공사하기 위해 박아놓았던 것들일 거예요. 그 나무들 사이에 쇠꼬챙이가 길쭉길쭉하게 박혀 있는 것도 보여요? 내가 그거 밟고 먼저 내려갈 테니까 주원 씨도 따라서 내려와요. 내가 아래에서 받쳐줄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편가는 주원을 돌아다본다.

    주원은 아무런 대답 없이 갑자기 움찔하며 비탈 위 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편가도 주원의 눈길을 따라 위쪽을 올려다본다.



갑자기 주변이 적막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새소리들이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채 위쪽을 노려보듯 살폈다. 나무들 사이를. 그리고 그 너머를. 이쪽에서는 비탈이 심해서 나무들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눈 닿는 곳 전부를 세밀히 살폈다.

    편가가 먼저 얼굴을 주원에게 돌리며 살짝 고개를 젖는다.

    주원도 긴장했던 얼굴을 펴며 편가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곧 편가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축대 쪽을 바라보았다.

    편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왼쪽으로 옮긴다. 대여섯 걸음을 옆으로 걷고 나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축대 위에 짚고 오른 다리를 내린다.

    조심조심…….

    편가는 축대 속에서 삐져나온 배수 파이프에 발을 걸쳤다. 파이프가 플라스틱이라서 혹 부러지지 않을지 점검하듯 발로 슬쩍 눌러본다. 몇 번 톡톡 친다. 그러더니 결국 파이프에 발을 꽉 딛고서 다리를 내린다. 이번에는 몸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이다. 괜찮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다른쪽 다리를 내려서 파이프 오른쪽에 삐죽 나와 있는 나무막대를 짚는다. 살살……. 괜찮은 모양이다. 편가는 다리를 다 내려서 막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나서 잠시 안전한지 확인하는 듯 동작을 멈췄다. 그런 다음 다시 왼 다리를 내려 뻗는다. 그 밑의 다른 나무막대로.

    그렇게 하나하나 확인해 가면서 편가는 조심조심 내려가더니 거의 다 내려갔다 싶었는지 펄쩍 뛰어내렸다. 성공.

    편가가 위를 올려다본다.

    “가방 먼저 던지세요. 이리로.”

    주원이 쭈뼛거리자 편가가 재촉한다.

    “빨리.”

    주원은 가방을 어깨에서 벗어내리고 축대 위에 주저앉았다.

    “얼른.”

    주원이 팔을 들어서 가방을 내밀었다.

    “빨리 던지라니까.”

    주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입을 꼭 다물고 가방을 살짝 던졌다. 그러나 가방이 편가 머리 뒤로 날아간다. 편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서 등 뒤로 떨어지려는 가방을 펄쩍 뛰며 받았다. 주원이 생각보다 멀리 던졌던 모양이다.

    “주원 씨, 내려오다 떨어지면 내가 아래에서 받아줄 테니까 얼른 내려와요. 내가 내려오는 거 봤죠? 우선 한 발을 제일 위에 있는 파이프에 올려놔요. 한번 해봐요.”

    주원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그 다음 왼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래 바로 거기예요. 조금만 더, 조금 더 발을 내려요. 조금 더…….”

    주원이 간신히 발로 파이프를 딛긴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래에서 편가가 소리쳐서 말해 주는 대로 한발 한발 교대로 내려딛었다.

    주원은 온몸이 긴장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파이프와 나무막대와 쇠꼬챙이들을 하나하나 딛고 붙잡고 하며 내려갈 뿐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하나만 내려딛으면 된다. 편가가 다가와서 손을 올려 주원의 허리를 붙들어 주려 했다. 주원은 몸동작으로 뿌리쳤다. 그런 다음 혼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런데 아뿔싸!

    쇠꼬챙이에 옷이 걸린 것이다.

    주원의 윗도리 앞섶이 좌악 찢겨나갔다.

    주원은 뛰어내리는 반동으로 땅에 발을 디디면서 뒤로 조금 물러나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편가는 주원이 넘어지지 않게 뒤에서 등을 받쳐주었다. 아마 그때는 옷이 찢긴 줄도 몰랐을 것이다.

 


주원이 안도하는 숨을 내쉬며 일어나는데 찢긴 앞섶이 펄럭인다. 주원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울상이 되었다.

주원은 한 손으로 앞섶을 잡으며 편가를 돌아다보았다.

    편가가 당황해 하며 다가와서 앞섶 쪽으로 손을 내민다.

    주원은 그 손을 피했다. 그리고는 편가가 들고 있는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주원은 눈을 들어 자신이 내려온 숲 옆, 저택 쪽으로 주욱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쳐다보았다.

    숨이 탁 막혔다.

    그곳 숲 옆 위쪽으로 보이는 저 멀리 바위 위에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이쪽을 쳐다보면서. 손에는 총을 든 채.

    조각가 여자.

    편가도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자는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서부영화 주인공처럼.

    주원은 입을 꼭 다물었다.

    살인자…….

    편가가 오른손 손가락 둘을 자기 입술에 갖다댔다가 떼며 여자 쪽으로 주욱 내밀었다. 여자 쪽으로. 그리고 후 불었다.

    이별이 키스.

    그리고 한 번 더.

    그러더니 오른팔을 내려서 허리 근방에서 왼쪽으로 내리며 허리를 살짝 굽힌다.

    이젠 끝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을 번쩍 들어 흔든다.

    바이바이.

    여자는 여전히 동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주원과 편가는 뛰다시피 하며 길을 내려갔다. 가끔 뒤돌아보니 여자는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이 한참 더 내려가서 뒤돌아보니 숲에 가려져 더는 그 꼭대기 바위가 보이지 않았다.

둘은 계속 서둘러서 내려갔다.

    포장도로가 나왔다. 차들이 지나간다.

    두 사람은 길을 건너 아래쪽으로 계속 걸었다. 동네가 보였다. 그 뒤로는 아파트숲이다.

    젊은 남자가 지나간다.

    편가가 뛰다시피 따라갔다. 주원도 급히 쫓아갔다.

    편가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 죄송합니다만, 핸드폰을 빌릴 수 있을까요?”

    남자가 인상을 쓰고 쳐다본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 게 있어서…….”

    남자는 여전히 쳐다보기만 한다.

    “살인사건 신고를 하려고요.”

    남자는 얼굴을 돌리고 그대로 가버린다. 편가는 그 뒤를 쫓아가며 몇 마디 더 했다. 그러더니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 주원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더 내려가 동네로 들어갔다. 아직 개발이 덜 된 지역 같았다.

    마음은 급한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이 든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편가가 쫓아가서 말을 붙였다. 그러나 관심 없는 듯 그대로 가버린다.

    편가와 주원은 다시 조금 더 걸었다.



초겨울 하늘이 흐리긴 날이 그리 춥지도 않고 찬바람도 불지 않는데 왜 동네가 이렇게 썰렁한 거야.

    편가가 이렇게 투덜거리는데 조그만 잡화점이 눈에 띄었다. 한 사람이 그곳에서 유리문을 열고 막 나오고 있었다. 편가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편가는 남자 앞에서 한번 멈칫하더니 그대로 상점으로 가서 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원도 거의 달리듯이 그곳으로 갔다.

    주원이 가게 앞으로 가서 열린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편가가 핸드폰을 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가게 주인에게서 전화를 빌린 모양이다.

    편가는 저택의 위치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편가가 가게에서 나왔다. 맥이 탁 풀린 모습이다.

    주원은 편가를 불렀다.

    “나 좀 봐요.”

    편가가 다소 풀어진 눈으로 주원을 바라본다.

    “이 사건에서 내 이름 대지 마세요. 내 이름 나오지 않게 하란 말예요. 알겠어요? 절대로, 절대로! 내 이름이 나오면 나 그쪽 안 볼 거예요.”

    편가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지 입을 벌린다.

    그것을 무시하고 주원은 다시 내뱉듯이 말을 잇는다.

    “내 말 알아들었어요? 나 이런 일에 휘말리는 거 싫어요. 오늘 지금까지 겪었던 일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내 이름까지 나오면 나 미국으로 그냥 가버릴 거예요. 오늘 나는 여기에 온 적도 없고, 그 여자 만난 적도 없어요. 원래부터 나는 여기 오기로 되어 있지도 않았잖아요. 알겠어요?”

    “아니, 그래도 목격자인데…….”

    “목격자고 뭐고 필요 없어요. 제발 내 말대로 해줘요. 알았죠?”

    편가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하려 한다.

    “나 집에 갈 거니까 택시나 잡아줘요.”

    편가는 항복한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했다.

    “저 아파트 쪽에 가면 택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편가는 주원을 이끌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갔다.     


      

주원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평일 낮인데도 길이 많이 막혔다. 집에 도착하니 5시 가까이 되었다.

    주원이 대문 스피커폰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린다.

    주원은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버럭 열리며 남궁 여사가 뛰어나온다.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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