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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9.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26)

제6장 | 하늘정원(2)

주원은 편가의 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태권도 페스티벌 쇼가 있는 날이다. 태권도 뒤에 페스티벌 쇼라는 말을 붙이니 어색하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다른 도장에서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은 자신이 방해될지 몰라 일부러 조금 늦게 도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학부형과 아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도장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도장 가장자리 쪽으로 빙 둘러놓여 있는 의자들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도 더 많은 이들이 서 있었다.

    바깥의 날씨는 갑자기 엄청나게 추워져서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울 뿐만 아니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아래로 수은주가 내려갈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도장 안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훈훈했다. 도장 안 여기저기에서 가스히터와 전기히터, 석유히터 등이 불빛과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난방기구들이 평소보다 서너 배는 많은 것 같았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서 사람들 열기도 도장 안을 따뜻하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도장 양쪽에는 행사용으로 준비해 둔 것 같은 각종 패널과 종이 장식들이 쌓여 있었으며, 현악기와 관악기, 그리고 악기 케이스들도 꽤 많이 보였다. 다른 한쪽에는 드럼세트와 여러 개의 기타도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요란한 만국기 장식과 성탄장식이 섞여 있었고, 단의 앞쪽 양옆에는 커다란 성탄 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또한 벽마다, 그리고 창문에 드리운 두꺼운 커튼마다 성탄장식으로 요란했다. 도장 앞쪽에서는 성탄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각종 화분과 화환도 앞쪽의 무대 뒤는 물론 도장 옆으로 주욱 늘어서 있었고, 정장 차람의 사람들이 무대 옆 의자, 아마도 귀빈석 같은 곳에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게다가 무대 한쪽에는 각종 상패와 상장, 트로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마디로 축제였다.



주원이 입구 쪽 사람들 사이에서 반은 숨듯이 서 있었는데 저 앞쪽에서 부산하게 왔다갔다하던 편가가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까 낮에 오늘 저녁에 꼭 와달라고 카톡을 보내왔지만 답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편가가 평소보다 더 반갑다는 듯이 호들갑스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주원은 좀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 사람들 틈으로 슬그머니 숨어들었다.

    편가가 굳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와서 주원 앞으로 왔다. 사람들이 얼굴을 돌려 쳐다본다. 주원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편가가 요란한 말과 동작으로 주원을 이끌고 사람들 틈에서 나와 앞쪽으로 간다. 주원은 마지못한 모습으로 엉거주춤 뒤따라갔다. 귀빈석 같은 곳으로 가서 주원에게 빈 의자에 앉으라고 한다. 주원은 편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얼굴은 다소 붉어진 느낌이다. 편가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주원을 이끌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여러 물품이 쌓여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 사람들도 들락날락하며.

    주원은 한 태권도 사범이 물건을 잔뜩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틈을 타서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어 편가에게 주었다. 수표 몇 장이 들어 있는 봉투.

    편가가 깜짝 놀라며 안 된다는 제스처를 한다. 그때 누군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서 주원은 편가의 까만 도복 윗도리 가슴께로 얼른 밀어넣었다.  

    편가는 고맙다고 하며 주원에게 도장 사무실에서 나가 무대 근처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주원도 나갔다. 그러나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사무실 문 입구에서 어정쩡하니 서 있었다.     



행사는 매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태권도 시범이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아이들 수십 명이 가장 먼저 나와서 도장을 꽉 채우고 우렁차게 구호를 지르며 여러 형태의 품새를 선보였다. 그리고는 유치원생인 듯한 꼬마들 십여 명이 나와서 깜찍한 모습으로 발을 올려차고 정권을 내밀며 소리 지르는 장면에선 도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진동했다.

    그리고 나서 시범 경기가 펼쳐지고 유단자 고수들이 나와 나무판자와 벽돌 격파를 비롯해서 마치 실전과 같은 여러 대련 시범을 선보였다. 뒤이어 승급 및 승단자들에게 증서와 트로피를 수여했다. 또한 각 도장의 사범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마치 묘기 시범처럼 칼과 창을 들고서 각종 형태의 무술을 보여주었는데, 이 순서에서는 편가도 나와서 멋지게 솜씨를 과시했다.

    주원은 그런 광경을 처음 보여주는 편가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편가는 주원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으나 어쩐지 편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원에게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 느낌이 들었다. 시범을 마치고 주원이 서 있는 곳 맞은편의 무대 옆으로 편가가 들어갈 때는 어깨를 주욱 펴고서 고개를 돌려 주원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주원은 보라는 듯이 손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박수를 보냈다. 씨익 미소 짓는 편가. 주원도 따라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나니 갑자기 도장의 시범 보이는 장소가 텅 비고 말았다.

    잠시의 정적.



모든 사람이 궁금한 표정으로 숨 죽이고 있는 중에 여러 도장의 사범들이 철제 접이의자를 들고 나온다. 양손에 하나씩. 그리고는 도장 현관문 쪽을 향해 마치 극장 좌석처럼 둥그렇게 몇 줄로 늘어놓는다. 마지막에는 그 앞에 작은 지휘단을 갖다놓았다.

    그 다음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도복을 입은 채 악기를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클라리넷, 호른, 트롬본, 실로폰, 큰북, 작은북, 드럼, 심벌즈, 트라이앵글, 기타 등등.

    순식간에 30개가 넘는 의자에 아이들이 모두 가서 앉았다.   

    부모들이 박수를 요란하게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기 부모 쪽을 쳐다보며 손을 흔든다.

    그 박수 속에서 한 사람이 검은 도복을 입은 채 아이들 의자 뒤쪽, 즉 무대 쪽으로 걸어나왔다. 오늘의 주인공이 될 편가가.

    편가가 크게 절을 하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편가 자신은 글로벌 태권어린이 마술오케스트라단을 꿈꾸고 있다. 주로 한국과 미국의 태권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단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공연에 앞서서, 또한 공연 도중에 편가는 끊임없이 각종 마술을 펼쳐보이며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다. 공연 뒤에는 어린이 단원들의 간단한 태권도 시범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연도 하고 태권도도 전파하면서 대한민국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첫 단추를 꿰는 의미에서 오늘 그 선을 보이고자 한다. 아직 정식으로 오케스트라단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임시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아이들을 모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지만 열심히 연습을 했다. 편가 자신은 마술 전문가여서 마술시범도 보이는 한편, 실력은 없지만 자신의 지휘로 어린이 오케스트라단이 간단한 곡 몇 가지를 선물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우리 태권도오케스트라단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태권도 시범과 함께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는 겁니다. 그곳에서 제가 마술공연도 하면 더 좋고요. 이것이 꿈만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마치고 편가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열렬한 박수.

    편가가 두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뒤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돌아앉으라고 말을 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앉아서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려놓고 악기들을 손에 들고 잡은 채 편가를 바라본다.

    편가는 몸을 돌려 단상으로 향했다. 단상이라 해봐야 도장 마루보다 계단 한 단 높이 정도로 나무판을 대서 만든 것이다. 편가는 그곳에 올라가서 바닥에 놓여 있는 모자를 들어올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편가, 그 모자에게 쏠린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자세히 보기 위해서인지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뒤에서 앞쪽으로 뛰다시피 나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앞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단상 옆 사무실 문 앞에 있었던 주원은 사람들에게 밀려 문 쪽으로 바짝 붙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주원이 서 있는 벽 아래 전기 콘센트 쪽에서 지지지 하는 소리가 나며 작은 불꽃이 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돌아다보았다.

    불.

    시뻘건 불이 확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도장의 모든 전등이 꺼졌다.

    주원이 서 있었던 벽에는 천장 가까이에 작고 옆으로 긴 창문이 몇 개 나 있었고, 맞은편은 모두 창문이지만 겨울이라서 두꺼운 커튼을 쳐놓아 밖에서는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대 쪽은 벽으로 막혀 있고 그 너머에는 창고와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 쪽에는 조그만 창이 하나 있었으나, 창고에는 창이 전혀 없었다. 무대 반대쪽, 즉 입구 쪽에는 창문은 없이 유리로 된 현관문이 하나 있고 그리로 나가면 화장실과 계단이 나온다.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불을 피한다. 그 바람에 사람들 발에 치어서 전기 콘센트 바로 옆에 있었던 석유난로가 쓰러졌다. 그곳에서도 퍽 소리와 함께 불길이 확 치솟았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진한 석윳내를 풍기며. 그리고 순식간에 바닥에 놓여 있었던 옷가지와 벽에 세워져 있었던 각종 패널에 불이 옮겨붙었다. 갑자기 도장 안이 비명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룽거리는 시뻘건 불길로 인한 빛 외에는 도장 안은 거의 캄캄했다.  

    주원은 뒤로 물러나며 사무실 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그쪽으로 시커먼 연기가 확 몰려왔다.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주원 쪽으로 피하다가 발에 무엇인가가 걸려 쓰러졌다. 그 바람에 주원도 쓰러지며 사무실 문에 쾅 하고 세게 부딪혔다.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는 비명. 주원 근처 사람들이 쿨럭거리며 엉금엉금 기거나 벌떡 일어서서 도망가는 모습이 시뻘건 연기불 속에서 어렴풋이 비쳐 보였다. 주원 쪽으로 매캐한 냄새가 확 풍겨오며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주원은 간신히 일어나 더듬어서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에는 물건이 많이 쌓여 있어서 제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내부의 실루엣이 보여서 주원은 이리저리 부딪히면서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주원을 따라서 시커먼 연기와 탄내, 석윳내 등이 섞여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주원은 더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을 닫아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이켜 연기가 들어오는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그러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기며 불의 열기와 함께 연기가 더욱 짙게 몰려들어왔다. 주원은 다시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 창고로 들어가는 문. 주원은 그것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깜깜절벽. 그러나 주원을 따라서 연기 일부와 냄새가 쫓아들어왔다. 그래도 사무실에 있을 때처럼 강하게 역겹지는 않았다. 후유하고 숨을 돌리는데 문 밑으로 연기와 냄새가 스며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주원은 암흑 속에서 손으로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역한 냄새와 연기가 뒤쫓아왔다.

    그때 문득 주원은 핸드폰이 생각났다.

    그러나 주원의 가방은 언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없어져 버렸다.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주원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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