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탄생에 동참하기 위해. . .
지난 가을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소설 9권을 사서 읽었다. 인터넷과 서점을 다 뒤져 구한 책이다. 하지만 그 글들을 읽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으면 좋으련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지 단번에 읽으려 한 탓에 피로도와 약간의 지루함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 아홉 권 모두 끝까지 읽어낸 것에는 나름 자부심도 느껴진다.
한강 작가의 글은 역시 달랐다. 나도 글을 쓰고 많은 책을 읽고 있지만, 어찌 보면 옛 말로 장삼이사라고나 할까 그저 보편적인 글쟁이에 불과하다. 크게 뛰어날 것도 없고, (그래도 글을 쓴다고 하니) 아주 형편없는 글은 쓰지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이는, 그저 그런 필자 그 이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반면, 한강 작가의 글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웬만한 소설은 대개 사건 중심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겠지만, 여기에서는 극적(?)으로 대비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위와 같이 표현한 점 양해를 구한다.) 반면에 한강 작가를 비롯한 노벨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의식의 흐름이 주된 경향이라고 보고 싶다.
사건 중심의 글은 다소 읽기 편하다. (편할 수 있다.) 독자는 사건을 따라 읽어가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반면, 웬만한 노벨상 수상작품들은 내가 보기에 의식의 흐름에 보다 큰 비중을 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과 함께 진행한다 해도 실은 인간의 내부에서는 여러 형태의 의식이 공존하며 시간이 흐른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아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당장 닥친 사건이나 일에 의해 영향을 받아 저도 모르게 생긴 의식이기도 하다.
인간은 단편적인 성향만 지니고 있지 않다. 한 사건에 몰입한다 해도 사실 동시간대에 여러 의식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며, 그를 통해서 내적 갈등과 스스로의 판단을 거쳐 어떤 행위를 하게 된다.
노벨상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바로 이러한 부분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의식.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까? 또는 무엇을 보지 않으면서도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위에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을 썼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에 대해 알고 또 공감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나는 이 '의식의 흐름'을 어떻게 외적으로 표현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문학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건 중심의 글에 비해 의식 중심의 글은 읽기가 쉽지 않다.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 의식에 대한 글을 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원적 속성과 그 존재에 대해 더 깊이, 더 많이, 더 정확히 알고 싶어하는 욕구, 즉 호기심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앞에 감격적인 결실이 나타났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작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벨상 수상작 이외의 작품들이 가치나 의미에서 부족하거나 부실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취향 문제일 수도 있다. 노벨상 위원회 심사위원들의 시각을 존중해 주기는 하지만, 그러한 시각만이 옳고 그 외의 작품들은 가치가 덜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작들이 대부분 인간의 본성을 더 깊이 파고들려 했다는 점만은 분명한 듯하다. 시대와 인물과 환경을 떠나 인류 공통의 본질적 가치에 더욱 본원적으로, 그리고 깊이 다가가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쯤에서 이 글은 좀 다른 길로 나아가려 한다. 어찌 노벨상 작품들뿐만이랴, 지금 현재 내 책꽂이에 떠억 버티고 있는 저 숱한 장삼이사 책들도 나는 노벨상 작품 못지 않게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내 글, 내 소설, 내 작품들도 그에 포함된. . . (다고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 . . )
마치는 글로 한마디, 모든 글과 글쟁이와 글책들에게 한없는 축복이 지금부터 영원토록 있으.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