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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스런 후후작가 Jun 13. 2024

신들린 연기자

볼빨간 삿춘기 

오늘도 다가온 즐거운 하교시간.



"잘 다녀왔어?"

"엄마, 나 윽.. 배가.. 너무 아파."

오만 인상 다 쓰고 배를 움켜쥐고 소파 쪽으로 안전하게 쓰러지듯 눕는다. 온몸으로 '나 너무 아파서 공부 못해요. 오늘 학원 빼주세요.'를 샤우팅 하고 있는 것이다. 넌 정말 좋겠다. 연기 잘해서.

저번에 속아서 진짜 아픈지 알고 과외 빼줬었는데 얼마나 후회했던지. 바로 나았다고 간식 먹고 아프다는 핑계로 뒹굴거리며 놀았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엔 절대 안 넘어간다.



"점심 못 먹은 거야?"

"아니 먹었어. 그런데 조금 먹었어."

"닭강정 먹어. 먹고 빨리 과외가."

"나 아파 닭강정 안 먹을 거야. 과외 못 가 오늘." 이러며 식탁을 한 바퀴 돌며 몸은 소파에 뉘이지만 눈동자는 닭강정에 붙어있다. 빠르게 캐치

"너 문법 숙제 미완성이라 혼날까 봐 그러지?"

"배도 아프고 기운도 없어, 진짜야. 그리고 어제 끝까지 노력했는데도 못했어. 나 혼나는 거 싫어. 여기 나랑 안 맞아 안 갈 거야."


어린아이가 바닥을 구르며 생떼 부리듯 바닥에 나뒹굴더니 슬쩍 내쪽을 쳐다보고 반응 없으니 꺽꺽대며 울기 시작한다.

와.... 전에 한번 봐줬더니 학습되었어.

나의 머릿속 생각은 아이의 먼 미래까지 뻗어나가 훗날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을 회피하며 살아갈 아이의 미래까지 봐버린다. 그건 안되지. 금쪽이 모드 스위치 온.


"후야, 너 충분히 노력한 것 잘 알아. 이미 한 숙제도 있는데 왜 안 가려고 해?"

"엄마 나 싫어 혼나기도 싫고 여기나랑 안 맞는다니까."

이미 싫어 싫어 안 해 안 해 모드로 돌아선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대화가 안 된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잖아. 엄마 차에 시동 걸어놓을 테니까 바로 나와 알았지?"


3분

5분

7분...


지금 내려오지 않으면 늦는데... 안 내려온다. 전화로 독촉해야겠다.


"빨리 와, 모 하는 거야? 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혼나기도 하고 수정하며 그렇게 사는 거야. 도망가지 마."

"도망갈 거야, 싫은 건 안 할 거야."

와 뭐 이런 고집불통이 다 있나 싶다.

"너 엄마 올라가면 가만 안 둬. 방학에 놀러 가는 거 다 취소야."

"안 갈 거야. 방학 여행도 안 갈 거야."

그래 싫어 싫어 모드에서 대화자체가 안되지. 더 나아가면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니 이쯤에서 그만해야 한다.

쫓아 올라가서 단전부터 끌어올려 나 너 너 너무 무무 화났어. 빨리 나와. 목소리로 호통치며 그렇게 사는 거 아니라고 정신교육을 시킨다. 이건 삶을 대하는 태도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에 초장에 잡아야 한다.

눈물 흘리며 차에 앉아서 입을 내밀고 있다.


"엄마 지금 숙제 미완성으로 가면 나 가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해. 전에 숙제 못해가서 혼나면서 진도 조금밖에 못나갔단 말이야. 의미도 없어."

"그걸 알면 미리 했어야지. 진도를 한 장을 나가건 10분을 나가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당면한 문제가 싫다고 도망치는 건 정말 최악의 행동이야. 싫은 거 알겠는데 노력해 봐. 엄마 지금 많이 화났는데 노력하고 있어."

씩씩 대며 영어 과외를 15분 늦게 데려다주고 오니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프다.




자식이 뭐라고. 자식 앞에서는 당면한 문제 회피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큰소리 뻥뻥 처 놓고 너무 혼날까 봐 카톡으로 선생님한테 사정사정했다.  

이건 뭐 두 손 모아 비는 수준으로 '주말에 애비가 한 달 만에 와서 여행을 다녀와서 숙제를 못했다.' '전날에 밤늦게까지 노력했으니 정상참작 해달라'고 주절주절 궁상맞게 사정사정했다.


수업 마치고 걸려온 전화 너머로 아이가 미안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 지를 때 지르고 다음에는 감싸주기.


"엄마 수업 끝났어."

"우리 후님 목소리가 풀이 죽었네. 많이 혼났어?"

"응, 그런데 선생님께서 많이 참고 계신 게 느껴졌어."

샘이 무섭긴 무섭나 보다.  

"숙제 다 못해서 혼날까 봐 두려웠구나. 두려워서 그랬어. 끝까지 우기지 않고 수업받으러 간 것 진짜 잘했어."

"엄마 내가 미안해."

아이의 사과에 갑자기 눈물이 나서 목이 메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엄마. 엄마? 엄마 왜 말이 없어."

"으... 응, 엄마가 갑자기 목이 메어서 그랬어. 아이고 눈물나라. 사과해 줘서 고맙다. 도망치지 않은 것도 고맙고."

"응 히히"

갈등 종료의 시그널로 아이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학원 안 빠지고 가서 칭찬받는 건 너밖에 없다고 한소리 하고 끊으려는데


"히히 엄마 저녁 모야?"

기승전 밥이구나. 이 녀석.

"우리 후 제일 좋아하는 연어덮밥 먹자."

"오오 신난다. 엄마 나 닭강정도."

"배 아프다며 못 먹는다며? 알았어. 빨리 와"

 

한 그릇 싹싹 비워서 잘 먹고 기분 좋아서 아이의 눈이 순해졌다.

저녁 먹으며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나서 놀아야 오늘과 같은 문제가 안 생긴다.

중간중간에 노는 거 없이 열심히 좀 해보자. 매일 똑같이 엄마가 의자에 더 오래 앉아있게 하지 말고 스스로 쫌! 알아서 하라고 잔소리 왕창

오늘은 계획적으로 숙제 열심히 하겠단다.

어 그래. 기대감이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먹어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엄마 내일은 수학학원 가야 하니까 수학 숙제 열심히 할게요."

왠열 고분고분 그래그래. 한 시간 남짓 집중해서 하더니만

"아 나 쉬어야겠다. 쉬는 동안 게임 안 해요."

무슨 큰일 하는 것 마냥 당당하게 쉰다고 한다. 집중력 1시간. 끝.



"엄마 나 스키디비 토일렛 만들 거야."

안물안궁. 정말 오늘 나 털리게 해 놓고 넌 속도 편하다. 레고로 변기나 만들고 있고.

5분 쉬고 숙제 다시 한다고 했으니 믿어보자.

오늘밤도 참 길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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