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모든 의례를 상례(喪禮)라 한다.
관을 묻을 광중을 파고, 상여를 준비하고, 신주를 만드는 등 장사치를 준비를 하는 것이 치장(治葬).
시신이 놓인 영구(靈柩)를 옮기는 것은 천구(遷柩).
영구를 상여에 싣고 장지로 모시는 것은 발인(發靷).
영구를 광중에 하관한 후 봉분을 만드는 일은 묘역(墓域).
묘역이 끝난 후 영거(靈車)를 받들어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것은 반혼(返魂).
혼을 모시고 집으로 오는 길에 슬픔에 겨워 곡을 하는 것은 반곡(反哭).
이 모든 의식을 통틀어 장례라 한다.
사람이 죽을 것 같으면 식구들이 돌아가며 임종을 지킨다. 사망 시간을 모르면 장례를 올바로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잠자다가 조용히 죽었을 때는 방문을 열고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임종 시간이 된다.
숨을 쉬지 않으면 ‘숨이 떨어졌다’고 한다. 어느 학자가 죽음에 대한 한글 표현을 살펴보았더니 28가지라고 하는데, 근거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돌아가셨다’ ‘소천’ ‘운명하셨다’ ‘죽었다’부터 ‘뒈졌다’ ‘꿱!’ ‘밥숟가락 놓았다’ 등등 적어보았더니 열댓 개까지는 적을 수 있었다.
숨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면 돌아가신 분의 속적삼이나 생전에 입던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복! 복! 복!” 외친 후에 사망자의 본관 성과 생년, 이름을 부른 다음 “속적삼 가져가시오!” 세 번 외친다. 이종갑이라는 분이 돌아가시면-
“계사년 시월 축시 을미생 광주 이씨 종갑 별세. 속적삼 가져가시오!”
속적삼은 바구니에 담아서 영좌에 두었다가 상여가 나가고 나면 불에 태운다. 지방에 따라 지붕에 올라가지 않고 마당에서 초혼하고 옷을 지붕에 던져두기도 한다.
이렇게 한 인간의 죽음을 신에게 알리는 것이 초혼 또는 고복이다. 신을 믿건 안 믿건 예전에는 인간의 생사를 신과 함께 했다. 신도 이 세상에 한 인간을 내보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왜, 하필 속적삼일까?
저고리 안쪽에 입는 것이 속적삼인데 요즘으로 치면 런닝셔츠이겠다. 땀이 가장 많이 밴 것,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냄새, 체취가 밴 옷이다. 할아버지 냄새, 엄마 냄새. 지문이 아니라 냄새로 누구인지 기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속적삼인가?
초혼이라는 것도 기실은 육신을 떠난 혼이 멀리 가지 말고 장례 내내 함께 하자고 불러들이는 것. 자신의 혼에게도 냄새로 육신의 임자를 확인시켜주는 것인가?
사고사가 아닌 다음에야 요즘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병원 옥상에서 초혼할 수도 없고, 살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갈 수도 없다. 우리는 어느새 신과 멀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끼리 가까워진 것도 아니다. 신에게서, 인간에게서 멀어진 우리는, 그러므로 외로운 존재.
* 사진은 김시동 씨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