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흐린 주점에 가고 싶다

by 류재민

따지고 보면 아버지에게 받은 건 유전과 유산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카탈로그를 들고 설계사무소를 돌아다니는 건설회사 영업사원으로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를 아는 조문객들이 문상을 왔었다. 그중에 서울의 한 건설업체 임원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를 내게 소개했다. 언론고시를 보겠다는 야심 찬 목표가 거듭되는 낙방에 서서히 꺾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취업을 못 해 의기소침해 있던 내게 그 임원은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며 명함을 주고 갔는데,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살 터울의 여동생들은 이미 취업에 성공해 독립해 나간 상태였고, 이따금 집에 들를 적마다 몰래 내 서랍에 얼마간의 용돈을 몰래 두고 갔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동생 용돈을 받아 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사대 독자 장남이.


며칠 뒤 난 그 건설업체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직장이었다. 회사는 서울 강남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집값뿐만 아니라 뭐든 다 비싼 동네라 자취나 하숙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 회사 사무실 위층에 영업부장이 혼자 살고 있었다. 용도는 회장의 집무실이었는데, 노총각 부장을 위해 밤에는 숙소로 편의를 제공했다. 난 입사일부터 부장과 한방에서 기거했다. 부장은 명실공히 ‘영업의 신’으로 불렸다. 그만큼 업무는 많았고, 퇴근은 늦었다. 자정을 넘겨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일찍 들어와도 밤 10시는 족히 넘었다. 난 그 시간까지 토목 용어사전을 들여다보거나, 청소기를 돌리거나, 다음 날 어느 설계회사를 방문할지 계획을 잡았다.


그러다 심야에 부장이 퇴근해서 들어오면, 토목 용어사전을 놓고 쪽지 시험을 봤다. 그리고 청소 상태를 점검받았고, 방문 예정인 설계회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쪽지 시험 결과는 항상 틀린 문제가 더 많았고, 청소도 불량 판정을 받은 날이 더 많았다. 그런 날에는 어머니보다 심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과로에 스트레스까지 더한 부장의 ‘노총각 히스테리’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살찐 부장은 코골이도 심했고,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에는 매우 심했다. 탱크가 굴러가고, 항공모함이 출항하고, 폭격기가 날아가며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부장은 몸은 둔해도 뇌는 민첩했다. 늦게 들어와도 항상 책을 끼고 살았고, 꼬박꼬박 신문을 펴봤다. “이 바닥이 워낙 거칠어서 건달 소리를 듣는 판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하고 머리에 든 게 없으면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다. 노가다 일만 잘한다고 계약 많이 따는 게 아니다. 여러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 항상 책을 보거라, 그리고 지식을 채워라.” 부장은 심성도 착해 임원진뿐만 아니라 부서원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회의 시간에는 부서원들 편에 서서 입바른 소리도 제법 할 줄 알았다. 한 번은 나를 회사에 데려간 임원이 영업사원들을 모아놓고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을 해 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장은 “애로사항이 없다는 게 심각한 애로사항”이라고 뼈를 때렸다.


그는 나를 배려했고, 진심으로 대했다. 무언가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애썼다. 어쩌다 휴일에 하자보수 민원이 들어온 현장에 가서 ‘땜빵’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휴일에 일을 시켜 미안했는지 얼마 안 되는 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난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사다 숙소에 와서 나눠 먹었다. 그렇게 부장은 나와 몇 년을 살면서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형이 없는 나의 ‘형님’이기도 했다. 숙소 방에서 둘이서 마주 앉아 소주를 한잔할 때나, 비 오다 멎은 흐린 날, 어느 주점에 앉아 술에 취하면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둘은 업무 외에 사생활과 관련한 고민도 허심탄회하게 주고받았다. 그나 나나 그땐 삶이 고단한 청춘이었고, 고독한 솔로였으니.


부장은 늘 과로에 시달렸고, 술과 담배로 나오는 건 한숨과 뱃살이었다.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한 홀어머니가 진 빚을 갚느라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공사 현장을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공사 계약 하나라도 더 따려고 공무원이나 건설공사, 설계회사 직원들의 애경사도 빠짐없이 챙겼다. 1년 365일 휴가는 없었고, 매일 동분서주했다. 등골은 점점 휘었고, 심신은 지쳐갔다. 어느 날은 수면제를 먹고, 어느 날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난 그 모든 장면을 지켜봤지만, 모른 체했다. 속으론 안절부절못했지만.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땐, ‘괜찮다’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던 부장. 내가 3년 만에 퇴사하고 내려왔을 때, 그는 유치원 교사와 결혼했다. 이제 ‘회장님의 집무실’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 후로 나는 그와 몇 번 만나 술을 마셨고, 그러다 뜸하게 연락을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긴 지가 또 몇 해 지났다.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우두커니 소주를 마실 때면, 뜬금없이 그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아이는 있을까, 어머니 빚은 다 갚았을까, 건강은 괜찮은지.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에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 지성사, 1998)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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