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1. 새로운 터전
당나라군과 동맹한 신라군은 전투 시작 열흘 만에 백제 사비성을 함락했다. 전쟁 통에 수많은 군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혔다. 생존자 중 일부는 고구려나 신라로 떠났다. 백제 땅에 남은 백성들은 당나라에서 보낸 관리들의 지배를 받았다.
당은 도독부를 설치해 통치에 나섰다. 다행히 관리들은 백제인들을 무력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민심이 순응한 건 아니었다.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는 건 백제인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제 땅에서는 한동안 ‘부흥 운동’이 벌어졌다. 부흥군 지도부는 왜국에 망명해 있던 왕자를 데려와 왕으로 세웠다. 즉위식은 왜국 왕에게 책봉을 받는 형식으로 치러졌다. 모욕적인 즉위식을 바라보던 부흥군 장수들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왜의 지원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일이었다.
그 시기 마천왕은 가족들과 함께 남하했다. 가마터에서 일하던 도공과 일꾼들도 행수인 그를 따랐다. 그들이 이주한 지역은 바다를 끼고 있는 장천(長川)이란 곳이었다. 장천은 당시 백제 유민들이 대거 정착했다. 천왕은 그곳에서 새로운 가마를 지었고, 그릇과 찻잔, 항아리와 옹기 따위를 구웠다. 그동안 살던 곳에는 못 미쳤지만, 기물을 만들기에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기물을 생산하려면 환경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양질의 흙과 물, 땔감, 판로가 필수적인데, 장천은 그 모든 걸 충족한 지역이었다.
월과 성도 이사 온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동네 어귀에는 시냇물이 흘렀고, 참붕어와 모래무지, 메기, 버들치, 다슬기, 가재가 천지였다. 높다란 산들이 서로를 껴안듯이 솟아있었고, 숲속 나무들은 빽빽하고 울창했다. 산에는 토끼며, 노루며, 꿩 같은 사냥감도 널렸다.
“오라버니, 오늘은 무얼 잡으러 갈까?”
“어제 산에 놓은 올무에 어떤 놈이 걸렸나 가볼까?”
“아, 그렇지! 얼른 가요, 얼른.”
둘은 동구 밖으로 나가 산등성이를 향해 달렸다. 양털 구름이 유유히 흘렀고, 가마터에서는 하얀 연기가 바람을 타고 피어올랐다. 새 가마터에서 첫 기물이 나올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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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은 도공 서너 명과 회의 중이었다. 곧 기물이 나오면 팔아야 할 거래처를 찾아야 했다. 장천은 바다를 끼고 있어 지리적으로 수출에 유리했다. 왜국에 판로를 마련한다면 목돈을 쥘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판로 개척을 어떻게 하느냐였다.
우선 왜국 상인들을 설득해야 했고, 현지를 오가며 판매 상황과 분위기도 살펴야 했다. 경우에 따라선 현지에 가마터를 세워 공급망을 구축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기느냐를 두고 천왕과 도공들은 고민에 빠졌다.
천왕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왜국에 다녀오는 게 어떨까 싶네.”
“행수께서 직접이요?”
“그렇지 않고선, 지금 이 시국에 누가 선뜻 가려고 하겠는가. 게다가 왜국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천왕은 어려서부터 왜국어에 능통했다. 저자에서 구해온 서적을 밤마다 틈틈이 읽었다. 하지만 그동안 왜인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과 직접 만나 유창하게 대화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는 직접 가기로 결심했다.
“행수가 안 계시면 여기 가마터는 어쩌고요.”
“자네들이 있지 않은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네. 달포면 될 걸세.”
도공들은 고집 세기로 유명한 그를 말리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문지방에 걸터앉아 어린애 손바닥만 한 찰흙을 주물렀다 폈다 할 뿐이었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천왕은 곧바로 떠날 채비를 꾸렸다. 부인 서 씨는 남편이 신고갈 짚신과 옷 보따리를 넣은 봇짐을 챙겼다. 그사이 산에 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월의 손에는 토끼 한 마리가 들려 있었고, 성은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아부지, 엄니! 어서 나와 보셔요. 제법 큰 놈을 잡았지 뭐요. 흐흐흐.”
성의 부름에 천왕과 서 씨가 밖으로 나왔다. 잡힌 토끼는 얼마나 발버둥을 쳤나 기진해 있었다.
“저녁에 장을 끓이면 되겠구나. 아버지 떠나는 길에 보신이나 시켜드리자꾸나.” 서 씨가 월의 손에 든 토끼의 귀를 건네 쥐며 말했다.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통보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떠나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어디로요?” 성이 천왕을 바라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가마터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금방 돌아올 거다.” 천왕은 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월과 성은 천왕이 토끼를 손질하는 동안 서 씨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두 아이 역시 아비의 성정을 알고 있었기에 말릴 순 없었다. 그저 무탈하게 다녀오기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빌 뿐.
다음 날 새벽, 괴나리봇짐을 맨 마흔 넘은 천왕은 장천만으로 향했다. 만(灣)은 크지 않았다. 목선 한두 대가 겨우 드나들 정도였다. 왜로 가는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뱃전에는 이른 아침부터 왜에서 온 물건과 가져갈 물건을 꺼내고 싣는 일꾼과 상인들로 붐볐다. 나루에는 배에서 내린 이들과 배를 타려는 이들이 관리에게 역권(오늘날의 여권)을 확인하는 통에 번잡했다.
바다는 잠잠했다. 천왕은 주머니에서 역권을 꺼내 관리에게 보였고, 관리는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역권 검사를 하는 관리가 한 명뿐이라 타고 내리는 사람을 일일이 확인할 틈도, 겨를도 없었다. 무엇보다 왜국에서 돌아온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백제인들이 왜를 왕래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이윽고 화물과 승객을 모두 태운 배가 미끄러지듯 만을 빠져나갔다.
천왕은 갑판에 올라 가마터 쪽을 쳐다봤다. 가마터 사람들과 가족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디,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모두 무탈하게 해 주소서!’ 그는 바다 용왕에게 빌고 또 빌었다. 연안에는 갈매기 떼가 끼룩거리며 날았고, 이름 모를 작은 물고기들이 이따금 물 위로 툭툭 튀어 올랐다. 아침 햇살에 반사된 물빛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