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제 최후의 날
왕은 그날도 궁녀들의 치마폭에 싸여 있었다. 당나라 사신이 가져온 술을 내오라고 해놓고 아침나절부터 술독에 빠졌다. 머리는 풀어 헤쳐 산발했고, 눈동자는 풀려 초점을 잃었다. 덥수룩한 수염에는 술과 침이 잔뜩 눌어붙어 지저분했다.
“야, 이놈들아! 술을 더 내오너라. 왜 이리 동작이 굼뜬 것이냐!” 왕은 이미 대취했다. 신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시종들에게 지시했다. 시종들은 재빨리 독에서 술을 길어 병에 따랐고, 병에 담은 술을 왕 앞에 대령했다.
“한잔 따라 보구려.” 왕이 장군에게 잔을 내밀었다.
“폐하. 황공하옵니다.”
“공이 내 곁에 있어 든든하오. 짐은 자네만 믿는구료. 부디 이 나라를 부탁하오.”
술잔을 비운 왕은 빈 잔에 술을 채워 장군에게 건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와 백제국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나이다.”
왕은 흡족해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그에게 무관 최고위 관직인 병관좌평(兵官佐平) 벼슬을 내렸고, 그는 크게 절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날 왕이 하사한 쌀로 밥을 지었다. 모처럼 한 식구가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최후의 만찬이었다. 장군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뒤따라 나온 아들이 장군의 행동을 이상히 여겨 무슨 말을 하려고 다가왔다. 장군은 입을 굳게 다물고 옆에 차고 있던 칼을 뺐다. 그리곤 돌아서서 아들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사립문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내가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장군. 미쳤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찌 이러는 것입니까?”
“부인. 이 나라는 이제 운을 다했소. 나는 곧 전장에서 죽을 것이고, 내가 죽으면 당신과 우리 식솔도 죽음을 면치 못하거나 노예로 살 거요.”
장군의 말에 아내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 남은 두 자녀를 데리고 나왔다.
“이 나라를 탓하지 말거라. 용서하지도 말거라. 다음 생에는 내 아내와 자식으로 태어나지도 말거라.” 장군은 마당에 꿇어앉은 가족의 목을 차례로 베었다. 하늘에선 천둥과 벼락이 내리쳤다. 장군은 갑옷으로 갈아입고 말에 올랐다. 가족을 참수하는 모습을 지켜본 참모장은 아무 말 없이 장군을 호위했다.
“장군, 가족들의 명복을 빕니다. 정중히 모시라고 휘하에 일렀습니다.”
“고맙네. 자, 어서 가세.”
“군사들은 이미 출정 준비를 마쳤습니다.”
장군과 참모장은 마지막 전장인 황산벌로 향했다. 다음 날부터 신라군과 일전을 치렀다. 장군은 장검을 휘두르며 맨 앞에서 싸웠다. 적진을 누비며 적장을 하나둘 무찔렀다. 일방적일 것 같았던 전투는 사흘이 지나면서 전세가 심상치 않았다. 잘하면 백제군에 승산이 있어 보였다. 그러다 장군이 전사했다. 적군이 쏜 화살이 불운하게도 가슴 한복판을 관통했다. 장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뒀다. 전세는 신라군으로 급히 기울었다. 신라군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북을 치며 술 취한 왕이 있는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궁은 혼란스러웠다. 항복하자는 부류와 항거하자는 부류가 첨예하게 맞섰다. 왕은 숙취로 아무런 말도,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구나.” 왕은 대신들을 물렀다. 왕궁의 밤은 빨리 왔다. 그날 밤, 왕은 어린 궁인을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모처럼 일찍 일어난 왕은 대신 회의를 주재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소신료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입궁 대신 피란을 택했기 때문이다. 일부 고관대작과 신하들은 신라군에 투항했다는 전언도 들렸다.
“폐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라군이 벌써 성 밖까지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왕은 황급히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피란 준비를 하거라. 어서 궁을 떠나야 한다.”
왕과 왕비, 왕자들은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궐 밖으로 빠져나갔다. 궁 안에는 궁녀와 친위병 삼백여 명만 남았다. 그들은 왕이 궁을 떠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궁녀들과 군사들은 적막감이 감도는 궁 안에서 신라군을 맞을 판이었다. 날은 잔뜩 흐렸고, 대전(大殿) 앞에는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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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과 성은 그날도 가마터에서 놀고 있었다. 둘은 의좋은 오누이였다. 월은 열세 살, 성은 열한 살이었다. 그들의 부친은 ‘마(馬) 천왕’으로, 나이가 마흔이 넘었다. 직업은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굽는 도공이었다. 가마터는 그의 일터이자, 일꾼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격구나 하러 갈까?” 성의 말에 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짙어 금세라도 비가 들이칠 듯했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집에 가서 젖을 만한 거라도 치워놔야겠다. 부모님 일거리를 하나라도 덜어 드려야지. 우리 때문에 늘 불구덩이 앞에서 고생하시는데.”
월의 말에 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내 생각이 짧았네.”
집으로 돌아온 오누이는 마당에 넌 빨래를 걷었다. 햇볕에 잘 마른 산나물은 소쿠리째 들어 부엌 안에 들여놓았다. 오누이가 집안일을 마치기 무섭게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가늘게 내리던 비는 순식간에 장대비로 바뀌었다. 하늘에선 우르르 꽝꽝하며 천둥과 번개가 쳤다. 놀란 형제는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폭 뒤집어썼다.
그들의 부모는 아직 가마터에 있었다. 가마터 한쪽에 임시로 만든 막사에서 비를 피했다. 일꾼들도 비를 피해 하나둘씩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비가 많이 오겠소. 오늘 일은 여기까지 합시다. 어차피 가마에 넣은 기물이 구워지려면 이틀은 걸릴 테고, 그 안에는 바쁜 일이 없으니 쉬엄쉬엄하죠.”
가마터 행수인 마천왕의 말에 일꾼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손을 씻고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천왕은 아내 서 씨에게 일러 막걸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와 인부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비는 갈수록 세차게 쏟아졌고, 술자리도 길어졌다. 술에 취한 인부들은 아무 데나 쓰러져 잠들었고, 정신이 있는 이들은 빗줄기가 잠잠해진 틈에 집으로 돌아갔다. 부부는 잠든 인부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서둘러 갑시다. 아이들 밥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부부가 귀가했을 때,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다. 월은 이불을 덮는 둥, 마는 둥 한 채 입을 떡 벌리고 잤고, 성은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있었다.
“아휴. 밥도 안 먹고 잠이 들었네. 깨울까요?”
“달게 자고 있는데 그냥 두시게.”
천왕은 천진난만하게 잠든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호롱불을 밝히고 책을 폈다. 그는 낮에는 도자기를 굽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책은 도자기와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그는 어떻게 해야 실용적이고 예술적인 기물을 만들어낼지 늘 고민하고 연구했다. 천왕이 책을 펴고 두어 장 정도를 넘기고 있을 즈음이었다. 밖에서 누가 그를 불렀다. “행수 어르신, 어르신 안에 계십니까?”
문을 열어보니 가마터 일꾼 봉이었다.
“봉이 자네가 이 밤중에 어쩐 일인가?” 천황은 숨이 턱 밑까지 찬 그를 마루에 앉히고 냉수를 떠다 줬다. 숨을 돌린 봉이 말했다.
“신라군이 쳐들어왔답니다. 벌써 궁궐 앞까지 갔다는구먼요. 계백은 황산벌에서 전사했고, 왕은 도망쳤다는구먼요. 인제 이 나라는 망했소.”
‘아!’
천왕 입에서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며칠 전 저자에 갔을 때 들은 소리가 있었다. 십수만의 당나라 군대가 수로를 향해, 수만의 신라군은 육로로 진격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덜컥 겁이 났다. 백제가 멸망하면 신라와 당의 지배를 받을 테고, 그렇게 되면 집안 대대로 이어오던 가마터는 어쩌란 말인가. 또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될 건가. 머릿속은 하얘졌고, 눈앞은 새까매졌다.
천왕은 봉이 돌아간 뒤에도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저리 계속 뒤척였다. 서 씨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이따금 끙끙거리는 신음을 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미 바뀌었다. 드디어 신라군이 백제 왕궁에 다다랐다.
적군은 성안으로 수천 발이 넘는 불화살을 쏘아댔다. 성안에는 불길과 연기가 치솟았다. 여기저기서 신음과 비명에 아수라장이 됐다. 궁 안에 있던 병력은 결사 항전했지만, 파죽지세로 몰아친 신라군을 막아낼 순 없었다. 친위대는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전멸했다.
왕의 출궁 소식을 뒤늦게 들은 궁녀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위대가 금방 무너지는 바람에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 성 근처 산에 피신했던 궁녀들은 신라군이 압박해오자 결단을 내렸다. 치마를 뒤집어쓰고 벼랑 아래로 하나둘 몸을 던졌다. 꽃잎이 떨어지듯, 분분한 낙화처럼.
도망갔던 왕과 일행은 심복의 배신으로 신라군에게 잡혔다. 그리고 신라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당했다. 이후 왕과 일족은 당나라로 추방당했고, 이국땅에서 생을 마쳤다. 왕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백제 멸망 배경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역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어쨌든 고구려, 신라와 삼국시대를 열었던 백제는 맨 먼저 멸(滅)했다. 700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