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생 전태일과 90년생 김군

전태일 서거 50주년에 부쳐

by 류재민

영화는 1995년 11월에 개봉했습니다. 수능을 마친 고 3 시절,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이었는데요. 관객이 몇 명 안 되는 허름한 극장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영화를 봤습니다. 제목은 아름다웠지만, 내용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입니다.


청년 전태일을 맡은 배우 홍경인 씨가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분신하는 장면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저는 곧장 서점으로 가 조영래 선생이 쓴 《전태일 평전》을 샀습니다. '25년 전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구나. 평생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았던 어머니 가슴은 얼마나 아리고 짓물렀을까'


매일매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직업병이 숱한 젊은 목숨들을 갉아먹고, 때로는 인간 이하의 가혹한 노동환경이 불운한 노동자들을 비명에 죽게 하고, 해마다 수백 수천 명의 광부들이 무너진 갱도 속에 생매장되어가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한다. 가난에 못 박혀 스스로 숨을 끊는 수많은 밑바닥 인간들의 죽음의 사연은 세상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리 목숨’이라고 말한다.
<전태일 평전, 조영래>

이듬해 봄 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신입생 시절 창작 동아리 활동을 하며 쓴 시(詩)가 있는데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나서였는지, 어느 노동자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뒤였는진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쓴 시(詩)입니다.

지난해 11월, 서울 청계천로에 있는 전태일 기념관에 간 적 있습니다. 그날 역시 추운 날의 오후였는데요.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아 기념관 곳곳을 둘러봤습니다. 거기서 만난 오동진 부관장은 “전태일은 지금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태일의 시대보다 풍요로워진 건 확실한데, 왜 청년들은 여전히 힘들다고 하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피라미드형 구조에서 최상단을 차지한 부유층과 엘리트 계층은 더 위로 올라간 반면, 중산층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사다리형 구조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의 부(富)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일부에 편중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난해 11월 서울 청계천로에 위치한 전태일 기념관을 찾았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사회 양극화는 보다 심화되고, 청년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이 대표적입니다. 원청과 하청, 재하청, 재재하청의 노동구조 역시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만성화된 병은 창창한 청년들의 목숨을 하나 둘 갉아먹고 있습니다. 2017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를 피하지 못해 숨진 김 군이 그랬고,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야간작업을 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김 군이 그랬고, 2019년 공사현장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해 숨진 김 군이 그랬고, 한화 대전공장 폭발사고로 숨진 김 군이 그랬습니다. 모두 ‘90년생 김 군들’입니다.

오늘은 전태일 서거 50주년입니다. 정부는 어제(12일) 전태일 유족에 1등급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훈장 수여는 전태일의 저항정신을 박제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프로젝트 신문 <전태일50> 홍세화 편집위원장은 이번 주 <한겨레 21>(1337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업재해로 매년 2천 명 이상이 일터에서 죽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미뤄지고 있다. 전태일 열사에게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제발이지 공약을 지키고 법을 개정한 뒤에나 추진하라.”


저는 전태일 서거 25년 만에 그의 삶을 다룬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본 지 25년이 흘렀습니다. 90년생이 일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대한민국, 48년생 전태일이 살았던 때보다 나아졌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 청와대 전 직원에 선물했다는 책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90년대생들은 IMF 직격탄을 맞은 70년대생들과, 상시 구조조정의 가능성을 가져왔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쑥대밭이 되었던 80년대생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안정된 생활은 특정 세대의 기호가 아닌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이다. 하지만 정작 90년대생들은 안정적인 삶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한다고 말한다. 공무원을 원하는 것은 단지 철밥통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이 정한 테두리, 즉 법정 근로시간에 따라 일하고 쉴 때는 쉬는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것이다. <90년생이 온다, 임홍택>

제 아들은 올해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아들이 ‘청년 전태일’만큼 자랐을 땐, 부모 가슴에 못 박고 스러지는 젊은이가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기자로서, 이 땅의 ‘청년 전태일’과 연대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는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어제저녁 전태일 서거 50주년 특집 다큐에서 양희은 씨가 부른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들어보세요.

*영상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39NVMoR-Dc

*상단 이미지 출처: 전태일 기념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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