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미
새해를 맞은 다운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수만 회장과 약속한 행복중 학폭 예방 활동을 그 연결고리로 삼고 싶었다. 지원금은 넉넉하게 받을 수 있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어떤 강사진으로 운영할지가 고민이었다. 새해 첫 주 월요일, 흥신소 삼총사가 머리를 맞댔다.
“당장 이번 달부터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건 힘들겠죠?”
“당연하죠. 무슨 계획안도 하나도 없이 어떻게….”
쾌한과 달래가 주고받는 말에 다운은 곰곰 생각에 빠졌다.
“저,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쾌한과 달래의 시선이 다운의 얼굴로 쏠렸다.
“일단 3월 개학 전까지 커리큘럼을 만들고, 그 안에 강사진까지 섭외하는 겁니다.”
“커리큘럼은 누가 짜는데요?”
달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운에게 물었다. 다운은 아무런 말 없이 달래를 쳐다봤다. 쾌한의 눈도 달래에게 향했다. 달래는 손가락을 집어 들어 ‘제가요?’하는 표정을 지었고, 다운과 쾌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사람은 뭘 하실 건데요?”
“우리는 강사진을 섭외해야죠. 안 그래요, 사무장님?”
“네? 아, 그렇죠. 아주 유능하고 훌륭한 분들을 모셔 와야죠.”
“자자, 이러면 역할 분담은 된 것 같네요. 다음 주 월요일 회의까지 저마다 맡은 업무를 어떻게 할지 준비해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오늘 회의 끝!”
월요일 오전 회의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운은 회의를 오래 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시간이 길어져야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요, 월요일 아침부터 심신이 피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친 다운은 흥신소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 1월의 찬바람이 귓불을 쓸고 지나갔다. 매서운 바람에 얼마 걷지 않아 코와 귀가 빨개졌다. 다운은 서둘러 흥신소 근처 찻집으로 갔다. 흥신소 업무와 관련해 중요한 미팅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몇 분 늦어 뛰어가다 하마터면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용케 중심을 잡은 다운은 ‘빛나라 커피숍’ 앞에 도착해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출입문 손잡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만나기로 한 상대는 이미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운은 헐레벌떡 자리로 가 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유, 선생님. 일찍 오셨네요. 제가 오전 회의 때문에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는걸요.”
상대방은 다운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밝은 미소로 손사래를 쳤다.
“정 소장님, 우리 이게 얼마 만이에요?”
“제가 제주도를 떠난 지 4년 됐고, 떠나기 1년 전에 성산에서 뵀으니까 3년 정도 됐나 봅니다.”
다운은 맞은 편에 앉은 중년의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5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은 청색 머플러에 파스텔 톤 롱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긴 외투를 입고 있었다. 외투 한쪽에는 골드 로즈 브로치를 달았다. 그녀의 이름은 ‘백장미’. 그녀는 제주도에서 유명 호텔을 소유한 CEO였다. 백 대표는 다운을 만나기 위해 아침 첫 비행기로 서울에 왔다고 전했다. 다운은 백 대표가 이른 시간부터 자신을 만나러 온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뭔가 다급한 사정이 있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근황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대표님께서 저를 이렇게 찾아온 이유부터 말씀하시죠.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백 대표는 다운이 단도직입적으로 나오자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정 소장은 해가 지나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좋아요. 본론부터 말할게요. 정 소장 말마따나 나는 지금 정 소장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건 정 소장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서둘러 왔네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죠. 설명을 들어야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사이 백 대표와 다운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커피 잔에서 하얀 김이 부옇게 피어올랐다.
다운은 제주도 성산 일출봉 주차장에 있었다. 남편의 불륜 증거 수집을 의뢰받고 현장 조사를 나온 참이었다. 초봄의 제주 날씨는 찼다. 그래서인지 유명 관광지로 소문이 났어도 비교적 한산했다. 주차장 주변에 노란 유채가 흐드러졌다. 다운은 차 안에서 성산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제주에 가지고 있는 추억이란 건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왔던 기억이 유일했다. 며칠 전 바람을 쐬러 휴가차 온 게 그의 두 번째 제주 여행이었다. 휴가 동안에는 푹 쉬고 싶다고 마음먹고 내려온 제주행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걸려 온 의뢰 전화는 공교롭게도 발신지가 제주였다. 육지에서 온 의뢰였다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마침 와 있는 제주에서 일거리가 들어왔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제주는 섬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달리면 2시간이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만큼 지리를 잘 몰라도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는 얘기다. 그도 어려우면 렌터카에 달린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면 된다. 관광지라서 차량 속도도 높일 수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미행하기 편하다는 얘기다. 다운이 성산까지 온 과정도 그런 지리적 이점이 얼마간 작용했으리라. 다운이 미행한 차량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남자는 50대 중반으로 보였다. 머리숱이 적었다. 검은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여자는 20대 초반처럼 보였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원피스 위에 파카를 걸쳤고, 빨간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커플은 손을 잡고 주변을 거닐었다. 다운은 조수석에 있던 카메라를 들고 두 사람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여자의 손을 꼭 쥔 남자의 손목이 꽤 굵었다. 왕년에 주먹깨나 썼나 싶을 정도로.
‘벌건 대낮에 딸뻘 되는 여자랑 손잡고 한가롭게 놀러나 다니다니!’
다운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입을 실룩거렸다. 주변을 걷던 다정한 커플은 유채꽃밭으로 향했다. 활짝 핀 유채밭에 들어간 그들은 환하게 어느 관광객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남자와 여자는 활짝 웃으며 손가락 하트를 했다. 사진을 찍은 그들은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다운도 카메라를 집어넣고 그 뒤를 조심히 따랐다. 바다에선 파도가 일렁였고, 차가 지나지 않는 길 위에는 적막이 흘렀다. 하얀 구름이 밀물에 떠밀리듯 바다에서 육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