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재민 Jun 16. 2024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흥신소

달려라, 유쾌한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쾌한은 넷플릭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다운의 전화가 걸려 온 줄도 모르고. 한 손에는 팝콘 상자, 다른 한 손에는 제로콜라를 홀짝거리며. 금방이라도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어 갈 듯한 사람처럼. 화장실이 급해진 쾌한은 그제야 핸드폰을 집어 들고 다운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소장님, 전화하셨네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수화기 너머 시끄럽게 들리는 배우들의 난투극 소리에 다운은 핸드폰을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사무장님, 또 넷플릭스 보고 계셨어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전화기로 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아, 헤헤. 저야 뭐 집에 오면 할 일도 없고, 밀린 드라마 보는 게 유일한 낙이니까요.”

쾌한은 주먹에 쥔 팝콘을 한두 개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쾌한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는 듯 다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소장님, 그렇게 몇 시간씩 앉아만 있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게다가 인스턴트 음식까지 드시면 살도 찌고요. 운동 좀 하세요.”

쾌한은 다운의 잔소리가 지겨웠다. 다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같은 소리를 자주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러게요. 운동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몸이 움직여 주질 않네요.”

수화기를 든 쾌한이 머쓱한 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무장님,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합시다.”

“네? 소장님이랑 제가 뭘 같이 해요?”

“달리기요!”

“달리기? 제가요? 에이,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일 싫어하는 게 달리기예요. 다른 운동은 몰라도 달리기는 정말 싫어요.”

“달리기만큼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 운동도 없어요. 살도 잘 빠지고요. 제가 친절하게 알려드릴 테니, 저녁때 1시간만 투자해 봐요. 딱 한 달만 하면 몰라볼 정도로 몸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쾌한은 다운의 제안에 잠시 망설였다. 어릴 때부터 운동회에서 달리기만 하면 늘 꼴찌만 하던 그였다. 뒤뚱거리며 맨 마지막으로 결승선에 들어섰을 때, 그를 바라보며 웃던 친구들 때문에 덩지 큰 플라타너스 뒤에 숨어 울기도 했다. 그다음부터 그는 달리지 않았다. 아무리 급해도 버스나 지하철을 뛰어가 타지 않았다. 맘편히 놓치고 다음 차를 기다렸다. 군대도 면제를 받아 구보 한 번 한 적 없는 그였다.      

하지만 차츰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매일 저녁 술자리에 가거나 드라마에 꽂혀 사는 인생도 무의미하다고 느낀 그였다.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지방간과 콜레스테롤, 혈압 수치가 정상 범위를 넘어섰다. 쾌한은 다운의 전화를 끊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벽에 걸린 달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근육질의 남성과 늘씬한 여성이 육체미를 자랑하며 쾌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당신도 이런 몸매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순간 그의 얼굴 근육이 살짝 실룩거렸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감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까짓것!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해보죠, 뭐!’

쾌한은 곧바로 다운에게 카톡을 보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30년 만에 달리기를 맘먹은 그의 표정에는 설렘과 동시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쾌한은 다음 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스포츠 매장에 들러 운동화와 반바지, 티셔츠를 구입했다. 달리기에 필요한 물품을 사서 돌아오는 발길이 가벼웠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쾌한은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이따금 폴짝폴짝 뛰기도 하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운과 달래는 쾌한의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자신감을 북돋아 줬다. 다운과 쾌한은 다음 날부터 사무실 근처 운동장을 달리기로 했다. 쾌한의 마음이 부풀기 시작했다.         


첫날 러닝은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로 시작했다. 다운과 쾌한은 충분히 스트레칭을 한 다음 트랙을 뛰기 시작했다.

“사무장님, 심호흡하면서, 천천히요.”

다운은 쾌한의 옆에 바짝 붙어 뛰면서 보폭을 맞췄다.

“하나둘 셋 넷, 숨을 마셨다, 내쉬었다. 걷듯이 뛰는 거예요.”

쾌한은 잔뜩 긴장한 몸에서 최대한 힘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100미터도 채 안 지나 숨이 차올랐다.

“안 뛰다가 갑자기 뛰려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벌써 힘드세요? 아직 한 바퀴도 안 돌았는데. 조금만 더 가보세요.”

다운은 계속 쾌한의 기운을 북돋았다. 400미터 트랙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쾌한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엉거주춤 뛰는 쾌한의 뒷모습은 마치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보였다. 이마에 맺혔던 땀은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트랙을 두 바퀴 돌았을 때, 쾌한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사무장님, 200미터만 더 가요. 오늘은 거기까지 합시다.”

다운은 쾌한의 등을 살짝 밀어주며 말했다. 쾌한은 대답할 힘도 없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한두 번 까닥거렸다. 쾌한은 그렇게 첫날 1킬로미터를 달렸다. 그리고 운동장 한쪽 인조 잔디에 벌러덩 누웠다. 불룩 튀어나온 중년의 배가 급하게 요동쳤다. 다운은 가방에서 스포츠음료를 꺼내 쾌한에게 건넸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킨 쾌한이 음료를 받아쥐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뛰다 지쳐 터질 거 같네요.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 걸 왜 하는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사무장님, 베리 굿입니다. 첫날치곤 아주 잘하셨어요. 이렇게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면 풀코스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겠는걸요?”

“뭐라고요? 풀코스 마라톤이요? 아유, 소장님. 그런 말 마세요. 듣기만 해도 토가 나오려고 해요.”

다운은 손사래 치는 쾌한의 표정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팔순 넘은 어르신도 거뜬히 뛰는데요. 사무장님 나이면 청춘이에요. 저랑 일주일에 두 번씩만 뛰어봐요. 1년 뒤면 하프코스는 눈 감고 뛰게 해 드릴 테니.”

“정말요? 제가 1년 만에 하프코스를 뛸 수 있다고요?”

“그럼요? 사무장님 하는 거 봐서 6개월 만에도 가능합니다.”

쾌한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달리기라면 호환 마마보다 무서웠던 그였지만, 다운에게서 ‘마라톤 완주’라는 말을 듣고 보니 자신감이 샘솟았다.

‘정말, 정말 내가 마라톤 완주를 할 수 있을까?’ 쾌한은 다운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운은 이미 그의 표정에서 마라톤 완주의 꿈을 읽었다. 흠뻑 젖었던 쾌한의 옷이 차츰 마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옷과 가방을 챙겨 돌아갈 준비를 했다.

“소장님, 내일은 2킬로미터 도전이요!”

“사무장님, 고정하세요. 그렇게 무리하다간 몸살 걸려요.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잖아요. 천천히요, 천천히. 아셨죠?”

쾌한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장 주변으로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집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앞길을 환히 비췄다.      


*


집으로 돌아온 다운은 쾌한의 꿈이 이루어질 방법을 궁리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꿈바꼭질 재단이 주최하는 전국 마라톤 대회를 열기로 했다. 다음 날 재단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다운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대회 명칭은 ‘제1회 꿈길 마라톤 대회’입니다. 달리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종목은 5킬로미터와 10킬로미터, 하프 코스로 하겠습니다. 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진다면, 내년 대회부터는 풀코스도 도입하겠습니다. 참가비는 받지 않습니다. 재단 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다운의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참석자들은 모두 박수로 호응했다. 가장 들떠 있는 사람은 단연 유쾌한이었다. 쾌한은 벌써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쾌한을 바라보던 다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그래, 이거야. 이제 됐어.’

그로부터 3개월 후. 흥신소 인근 종합운동장에 1천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운동장 위에는 대회 이름이 적힌 커다란 애드벌룬이 둥실 떠 있었다. 대회 취지를 접한 기업과 단체에서 행사 기념품과 간식을 제공했다. 대회 안내와 지원을 돕고 싶다는 자원봉사자 50여 명이 노란 조끼를 입고 나왔다. 행사장 한쪽에선 꿈바꼭질 재단과 어르신 문해교실을 운영 중인 대학의 물리치료학과 학생들이 스포츠 마사지로 참가자들의 몸을 풀어줬고, 인근 병원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의료진과 앰뷸런스를 보냈다.

오전 8시. 운동장 중앙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 밸리댄스 공연이 시작됐다. 상철의 딸 달래가 또래 아이들 사이에 끼어 날렵하게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상철은 흥신소 식구들과 함께 딸의 공연을 넋 놓고 바라봤다.

“선배, 달래는 언제부터 밸리댄스를 배운 거야? 실력이 장난 아닌데?”

“따로 배운 건 아니고. 유치원에서 가르쳐 준 건데 곧잘 하더라고. 집에서 유튜브 영상보고 따라 하는 건 봤는데, 저렇게 잘할 줄은 몰랐네.”

상철은 싱글벙글하며 딸의 동작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참에 제대로 가르쳐 봐요. 혹시 알아, 대한민국 최고 밸리댄서가 될지?”

달래의 격려에 상철은 흥에 겨운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무대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밸리댄스 공연이 끝난 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대회 시작을 알렸다.

“상쾌한 아침입니다. 전국에서 오신 참가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 이곳에선 ‘제1회 꿈길 마라톤 대회’가 곧 시작됩니다. 대회 시작에 앞서 뜻깊은 대회를 마련해 주신 꿈바꼭질 재단 정다운 이사장님의 축사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힘찬 박수로 맞아 주기 바랍니다.”

러닝 복을 입은 다운이 무대로 올라가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시선이 모두 다운에게 쏠렸다.

다운은 살짝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입을 열었다.

“방금 소개받은 정다운입니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같은 평범한 시민입니다. 살다 보니 자신의 꿈이 무언지도 모르고 사는 분도 만났고, 이루고 싶은 꿈은 있지만 용기를 내기 어려워하는 분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하나씩의 꿈은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대개는 하루아침에 이루기 힘든 꿈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이루기 힘드니까 ‘꿈’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맑은 공기 마시면서 신나게 뛰어보세요. 그 길 위에서 뛰면서 여러분의 꿈이 뭔지, 그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도 세워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치지 않게 조심히 뛰고, 모두 행복한 꿈을 찾아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파이팅!”

다운의 말에 참가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드디어 대회를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하프 코스부터 출발했고, 10킬로미터와 5킬로미터 순으로 이어졌다. 쾌한과 다운은 10킬로미터에 출전했고, 상철은 모친과 딸 달래와 함께 5킬로미터에 참가했다. 장미래와 장현재 자매를 비롯해 행복중 ‘천방지축 나미진’ 모두가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달렸다. 천수만 회장도 직원들과 함께 회사 이름과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힘차게 뛰었다.

호수를 끼고 도는 코스는 경사가 심하지 않았다.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쾌청한 날씨는 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백발의 어르신부터 젊은 연인, 청소년들로 보이는 학생들, 유모차에 어린아이를 태우고 뛰는 가족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도로를 누볐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뛰기보다 걷기가 편한지 담소를 나누며 대회를 만끽했다. 중간중간 물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도 보였고, 사물놀이패는 북과 꽹과리를 치며 힘을 실었다. 건각들의 힘찬 레이스 속에 다운과 쾌한도 힘차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쾌한은 다운과 함께 한 지난 몇 달 동안의 훈련과 연습이 큰 힘이 된 듯싶었다. 5킬로미터 구간을 지날 무렵, 다운은 쾌한의 상태를 물었고, 쾌한은 엄지를 들어 보이며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1시간여 만에 쾌한은 난생 첫 마라톤 10킬로미터를 완주했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고,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혔다. 쾌한은 넓은 운동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그래도 행복했다. 다운이 그에게 완주 메달을 걸어주었을 때, 흥신소 직원들이 박수를 보내줄 때, 그의 눈가에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모두 고맙습니다. 제가 드디어 마라톤 완주라는 꿈을 이루었네요. 소장님, 저 내년에는 풀 코스 도전할 겁니다. 아, 정말 기분 짱입니다, 짱!”

쾌한은 그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먼저 도착한 상철 가족, 행복중 학생들, 천수만 회장과 직원들도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포토 존에서 다양한 자세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린 달래의 미소 사이로 보드라운 햇살이 수천수만 갈래로 스르르 부서져 내렸다. 처음 열린 마라톤 대회는 단 한 명의 낙오자나 부상자 없이 다음 대회를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