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꿈찾기
쾌한은 오늘도 폐지 줍는 노파의 리어카를 잡고 있었다. 노파는 요즘 들어 부쩍 무릎이 시큰거리고 아파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 사연을 들은 쾌한은 매일 아침 노파의 집으로 가서 리어카를 끌고 나왔다.
“이놈의 다리가 얼른 나아야 할 텐데, 공연히 총각이나 부려 먹고 있어서 미안하네.”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아침 운동할 겸 하는 거예요. 자, 어르신. 저는 이제 출근합니다.”
쾌한은 리어카 손잡이를 노파에게 이어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도 수고하세요.”
쾌한은 오늘따라 주름이 더 깊게 파인 노파의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씩씩하게 걸어가던 쾌한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꿈바꼭질 재단 월간 회의가 열렸을 때, 쾌한은 아침에 떠올린 생각을 내놨다.
“제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요. 한글도 모르고 까막눈으로 살고 계세요. 죽기 전에 한글을 읽고 쓰는 게 꿈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우리 재단에서 꿈을 이루어 줄 2호 대상자는 그 할머니로 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재단 직원들 대부분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다운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좋긴 합니다만, 할머니의 꿈을 어떤 식으로 이루어 드려야 할까요?”
쾌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했다.
“한글을 무료로 가르쳐 주는 어학당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나쁘지 않은데요. 근데 어학당은 어떻게 만들까요?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할까요?”
다운은 새 건물을 지으려면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소문난 사무국장이 손을 들고 나섰다.
“제 의견을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이사장님 말마따나 건물을 새로 짓는 건 예산도 많이 들고 공사 기간도 길어질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역의 대학과 연계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평생교육원도 좋고요. 저희 재단과 업무협약을 체결해서 관련 학과를 신설하는 겁니다. 기관에서는 강사와 참여자를 선발해 무료로 가르쳐 드리는 겁니다. 대신 강의실 대여나 강사 인건비는 재단에서 예산을 지원하는 거죠. 이 업무는 저와 기대감 실장이 맡아 진행해 보겠습니다.”
소문난 국장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쾌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소 국장 쪽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역시 교육자다운 발상입니다. 고맙습니다, 국장님.”
쾌한의 돌발 행동을 바라보던 재단 직원들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쾌한은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노파를 찾아가 소식을 전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노파는 크게 기뻐하며 쾌한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면서.
소문난 국장과 기대감 실장은 마침 한 대학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대학은 강의실을 무상으로 대여하기로 했고, 강사 인건비 역시 재단과 절반씩 분담하기로 했다. 재단으로서는 예산 지원을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인 운영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 재단과 대학은 5월의 마지막 날 대학 총장실에서 MOU(업무협약)를 맺었다. 총장과 다운은 업무협약 이후 악수를 나누며 공익활동을 통한 건전한 성장 의지를 확인했다.
‘어르신 문해교실’ 첫 수업은 9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폐지 줍는 할머니를 포함한 30명을 첫 학기 수강생으로 모집했다. 신입생은 참여도에 따라 점차 인원을 늘려가기로 했다. 쾌한은 마트에서 할머니가 메고 다닐 책가방을 샀고, 그 안에 연습장, 필기도구를 담아 선물했다. 할머니의 오랜 꿈이 쾌한의 따듯한 마음에 실려 영글어 가고 있었다.
‘어르신 문해교실’은 두 개 반으로 운영됐다. 1반은 폐지를 줍는 노파처럼 한글을 전혀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까막눈’ 반이었고, 2반은 겨우 한글만 아는 어르신들이 모였다. 각 반에 15명씩 들어갔다. 상철의 어머니도 2반에 포함됐다.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할까 싶었는데, 나랑 비슷한 처지에 계신 분들이 많더구나.”
상철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첫 수업을 다녀온 소감을 전했다. 상철은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잔뜩 새겨진 어머니를 보면서 덩달아 신났다.
“아마도 우리 엄마가 반에서 제일 예쁠걸? 젊었을 땐 미스코리아 뺨칠 정도로 한 미모하셨으니까.”
상철의 능글맞은 농담에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할망구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무람없이. 젊었을 때 안 이뻤던 사람이 어딨겠냐. 넌 안 늙을 줄 아냐. 얼마 안 있으면 너도 쭈그렁바가지가 될 거야.”
“에이, 내가 뭐라고 했어요. 우리 어머니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행복해 보여서 기운 넣어드리려고 한 소리지.”
상철은 평소에 하지 않던 애교를 다 부렸다. 하루하루 시간만 축내며 노년을 보내던 어머니가 측은해 보일 때가 여러 날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과 만나 공부도 하고, 친구도 맺으면 좋겠다는 꿈을 상철은 아득히 퍼지는 어머니의 눈가 주름을 보며 소망했다. 아빠와 할머니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달래는 길게 하품하며 이불을 끌어 덮었다.
“우리 강아지 졸린가 보네. 애비야, 달래 자게 불 좀 끄거라.”
상철은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끄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어머니도 첫날 수업이 피곤했는지, 새로운 환경이 낯설었는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폐지 줍는 노파나 쾌한뿐만 아니라, 상철과 그의 어머니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의미 있는 날이었다. 베란다로 나온 상철이 살며시 방충망 창문을 열었다. 가을 냄새 잔뜩 묻은 솔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후속작을 준비하던 상철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뿔테 안경 밑으로 해맑은 미소가 희부옇게 번졌다.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씩 박히며 반짝거렸다. 상철은 다시 문을 닫고 서재로 들어갔다. 오늘밤은 꽤 긴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을 안고서. 그날 상철의 서재에서는 밤새도록 노트북 타자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