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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Jul 07. 2024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흥신소

천수만의 봄

다운이 천수만 회장을 만난 건 초겨울 무렵이었다. 첫 마라톤 대회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한 달이 지났지만, 다운은 여전히 그때의 감동과 여운은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비 오듯 흩날리고 떨어지던 날, 다운은 천 회장의 의류회사를 찾았다. 전날 천 회장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물먹은 솜이불처럼 무겁고, 축축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 다운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다운은 비서실로 들어가 잠시 기다렸다. 5분쯤 지났을까, 회장실 문이 열리고 한 직원이 결재판을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비서실 직원과 결재판을 든 직원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목례를 나눴고, 비서실 직원은 회장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회장님, 정다운 소장님 오셨습니다.”

“오, 어서 들어오라고 해요.”

어제와 달리 천 회장의 목소리는 조금 생기가 돌아온 듯했다. 직원이 들어가도 좋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운은 풀린 구두끈을 매고 나서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천 회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다운을 반갑게 맞았다.

“정 소장님, 어서 오세요. 한참만이네요.”

“마라톤 대회 끝나고 정산도 하느라 통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아닙니다. 큰 행사 준비하고 치르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사업한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흐흐흐.”

다운의 얼굴을 오랜만에 봐서인지 천 회장의 표정은 밝아졌다. 마치 전쟁 통에 헤어졌다 만난 이산가족처럼. 하지만 다운의 눈에는 천 회장에게 뭔가 모를 수심이 있어 보였다. 두 사람은 응접용 소파로 이동해 나란히 앉았다.

“사업은 좀 어떠십니까?”

“쉽지 않아요. 정 소장도 뉴스 봐서 아시겠지만, 요즘 워낙 불경기라 문 닫는 회사가 어디 한둘입니까.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 가시밭길이 따로 없어요.”

“그래도 회장님은 사업 수완도 좋으시고, 인심도 후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천 회장은 다운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입에 침이나 바르고’라면서도, 얼마나 흡족한지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살며시 문이 열리고, 비서가 쟁반에 커피를 받쳐 들어왔다.

“얼마 전 베트남 출장을 갔다가 루왁 커피가 유명한 가게가 있길래 원두를 좀 사 왔습니다. 맛이 어떤가 한 번 드셔 보세요.”

감미로운 커피 향이 하얀 김과 함께 다운의 코를 자극했다. 다운은 찻잔에 입을 갖다 댔다.

“음. 맛이 진한데요? 향도 좋고요.”

다운의 말을 들은 천 회장도 찻잔을 코 앞에 가져다 향을 맡은 다음 한 모금 마셨다.

“처음 맛을 봤을 땐 무슨 맛인지 잘 몰랐는데, 마시면 마실수록 맛에 빠져드는 것 같더라고요. 하하하.”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천 회장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다운의 눈치를 살폈다.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아니, 할 말은요. 없어, 없어요.”

얼버무리는 천 회장의 동작이 영 어색해 보였는지 다운이 재차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그게 말이죠. 음,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유 참.”

말을 질질 끄는 천 회장을 보던 다운이 가볍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회장님, 밥 지으세요? 뜸을 잔뜩 들이시게. 편히 말씀하세요.”

천 회장은 그제야 다소 안심이 됐는지, 다운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네? 베트남에 학교를 세우고 싶다고요?”

다운은 수만의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 여태껏 그는 수만을 ‘돈 버는 사업가’로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교육 사업에도 관심이 있는 줄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정 소장. 솔직히 난 가방끈이 짧아. 어릴 적 하도 가난해 학교를 다니기 어려웠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했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돈 버는 재주는 있어 그냥저냥 먹고는 살지만, 이 나이에도 공부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네. 이번 베트남 출장을 갔다 남부지역 해안선을 돌았는데, 학교가 없는 마을이 있더라고. 아이들은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농사일을 돕거나, 물고기를 잡아 팔거나 해. 한창 공부할 나이에 말이야. 그래서 그 지역에 학교를 하나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네.” 

“회장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베트남이든 어디든 학교 하나 짓는 건 어렵지 않으시잖아요. 그런데 그걸 왜 굳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수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자네 말마따나 내 재력으로 맘만 먹으면 학교든 뭐든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말일세, 내가 생긴 거랑 다르게 부끄럼을 타서 말이야. 내가 한 일을 세상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지 않아. 정 소장이 재단을 통해서 진행해 줬으면 싶어.”

그제야 다운은 수만의 뜻을 이해했다. 선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다운은 수만이 갑자기 달리 보였다.

“그럼 회장님께서 생각하는 학교는 어떤 모습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으음. 내가 꿈꾸는 학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 나라에는 이미 한류 열풍이 불어 우리나라를 동경하는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꽤 많아요. 우리가 그 지역에 학교를 지어 베트남어와 한글을 함께 가르쳐 준다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겠어요? 양국 관계는 물론, 국위 선양까지 되고 말이지. 어떻습니까?”

수만의 제안을 들은 다운은 공감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심 불안과 걱정이 들었다. 

“회장님 말씀이 무슨 뜻인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런 일은 해 본적이 없어서요. 전문가 집단의 도움은 받아야겠지만, 선뜻 내키진 않습니다.”

수만도 다운의 걱정이 무슨 의미인지 표정에서 읽었다. 하지만 수만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를 꺾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인 절차와 지원은 우리 회사 총무팀과 고문 변호사에게 맡기겠습니다. 모든 일은 저희가 할 테니, 꿈바꼭질 재단 이름만 빌리고 싶습니다.”

“재단과 저더러 얼굴마담을 해 달라는 거군요?”

“에이, 얼굴마담이라뇨? 그건 극단적인 표현이고, 콘트롤타워 역할을 해 달라는 겁니다. 아무래도 재단이 대학과 함께 하고 있는 어르신 문해교실이 있잖아요. 그걸 베트남에 그대로 이식하고 싶은 생각이에요. 소장님께서 노하우가 있으니 전체적인 틀을 잡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다운은 수만의 설명을 듣고 나서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흥신소로 돌아온 다운은 진달래 주임한테 이틀 뒤 재단 이사회를 소집해 달라고 전했다. 다운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을 만지작거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어르신 문해교실을 운영 중인 행복대 총장 이대로였다.     

“어서 오세요, 총장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운동하고, 식이 조절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당뇨라는 게 죽을 때까지 관리해야 병이라 성가시고 귀찮은 게 한둘 아니지만, 사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려면 어쩌겠습니까.”

지병을 앓고 있지만, 이 총장은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대 청년처럼 피부가 팽팽했다. 학생들과 어울리며 살아서 그런지 유머와 패션 감각도 뛰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보디빌딩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쏟아낼 정도였다. 

“그나저나 요즘 흥신소는 좀 어떻습니까? 소식을 듣자니 여러 사회 공헌 활동을 하고 계신다던데?”

“능력도 없는 제가 주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정 소장, 너무 겸손한 것도 자랑이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정말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부족한 건 채우면서 살면 됩니다. 그것이 공동체 사회죠.”

이 총장의 말은 다운의 마음에 촌철살인 같이 날아와 박혔다.

“총장님께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이 총장은 다운의 안경 너머 눈빛이 살살 흔들리고 있는 걸 눈치챘다. 

“세상에 풀리지 않는 고민은 없어요. 제가 풀어드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들어보죠.”

다운은 이 총장에게 수만의 제안을 설명했다. 다운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 총장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음.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그렇죠? 어렵겠죠?”

“쉽진 않지만,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다운은 그의 애매모호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총장은 어르신 문해교실을 운영할 때와 유사한 방식을 써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내놨다. 

“베트남에 보낼 교사 인력은 저희 대학에서 준비하겠습니다. 마침 동남아 국가 대학 중에서 3+1 유학제를 해볼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3+1 유학제요? 그게 뭔가요?”     

“대학 4년 가운데 3년은 국내에서, 나머지 1년은 외국에서 공부하는 제도예요. 학생들에게 어학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복수학위까지 인정하는 거죠. 베트남에 있는 대학과 교류협력을 맺는다면 한글 교사 수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르바이트하는 식으로 희망자 신청을 받으면 되니까요.”

이 총장의 말이 반갑게 들렸다. 한글 교사를 어떻게 모집하고 베트남에 보낼지, 현지에서 숙소는 어떻게 마련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기숙사가 있는 대학과 손을 잡는다면 숙소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방학 동안은 일정 금액을 내고 사용하면 될 테니까요.”

“아, 그렇군요.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해 한글 교실을 운영하면 되겠군요.”

다운은 이 총장의 조언에 실타래처럼 얽힌 고민의 매듭이 풀리는 것 같았다. 

“총장님 덕분에 큰 숙제 하나를 푼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분이 좋군요. 자,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 총장은 옷걸이게 걸어둔 흰 중절모를 고쳐 쓰곤 문을 열고 표표히 걸어 나갔다. 다운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허리 숙여 인사했다.       


 *


행복대는 베트남 남부 해안에 위치한 대학과 유학생 교류 협력을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 대학을 둘러싼 마을에 2개 학급 규모의 한글학교가 지어졌다. 천수만 회장은 학교를 짓는 비용과 강사비와 교재비, 관리비 일체를 지원했다. 행복대 유학생들은 주중엔 야학으로, 주말과 휴일은 오전 시간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강습료는 무료였다. 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동부 지역 거주자도 찾아왔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밀려드는 통해 학교는 붐볐고, 교실은 학생들로 넘쳤다. 학급당 정원이 15명이었는데, 1반에는 스무 명, 2반에는 서른 명 가까이 들어갔다. 꿈바꼭질 재단과 학교를 찾은 다운은 한글을 배우려는 현지인들의 열정과 의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만을 찾아간 다운은 현지 상황을 전달하고 교실을 몇 개 더 지어야겠다고 건의했다. 다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수만은 만면에 희색이 돌았다. 

“얼마든지요.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한글을 배우고 싶다면 누구나 오라고 하세요. 돈 걱정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다운은 수만이 베트남 한글학교에 쏟는 애정과 진정성에 감동했다. 흔히 재력가라면 어떻게 하면 재산을 더 불릴까를 고민하기 마련인데, 수만은 반대로 자비를 털어 사회사업에 몰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한글학교를 세워 한류 확산에 기여하는 애국심까지 발휘하고 있잖은가. 다운은 수만의 그런 모습에 존경심과 경외심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만은 자신의 자선 사업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오직 다운만이 한글학교 운영에 ‘키다리 아저씨’가 천수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수만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 소장, 이 사업을 제가 지원하고 있다는 건 저와 소장님만 아는 겁니다. 공연히 외부에 알려져 소문이 나면 제 진정성이 퇴색될 것 같으니까요. 약속 지킬 수 있겠죠? 그게 제 진짜 꿈입니다.”

“그럼요, 회장님. 저는 의뢰인 부탁을 수용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니까요.”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것에 감격한 수만은 다운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수만의 힘찬 악수에 다운의 손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수만의 허전했던 가슴에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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