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동 한마음 체육대회
상철은 두 사람이 오면 함께 먹으려고 양념갈비를 준비했다. 점심때 단골 정육점에 들러 최고로 좋은 등급의 한우를 사 왔다. 그런 다음 자신만의 비법을 이용해 특제 양념장을 만들어 고기를 넣고 재웠다. 양념갈비와 곁들여 먹을 반찬으로 선지해장국과 잡채, 냉면을 준비했다. 상철이 저녁 준비를 거의 마쳤을 때, 두 달래가 식당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어린 달래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 상철의 품에 안겼다.
“우리 딸, 언니랑 재밌었어?”
“응, 엄청 많이. 범퍼카도 타고, 동물원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었어.”
“우아, 엄청 신났겠네. 언니 힘들게 하진 않았겠지?”
출입문을 닫고 천천히 걸어오던 달래는 상철을 향해 말을 던졌다.
“힘들게 하긴. 내가 달래 덕분에 즐거웠던 하루였는데. 달래야, 고마웠어~”
두 달래는 서로를 바라보면 행복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 표정을 살피던 상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상철은 두 사람을 테이블로 데려가 앉히고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내왔다.
“선배, 무슨 대단한 걸 했길래 냄새가 이렇게 좋아?”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 보양식으로 준비했지. 자, 일단 1등급 한우와 특제소스가 만난 양념갈비부터 불판에 올려놓겠습니다.”
상철은 커다란 냉면 그릇에 담긴 갈비 두 덩어리를 집게로 집어 불판 위에 올렸다. 이미 숯으로 달궈진 불판은 고기를 얹자마자 지글거리며 입맛을 돋웠다. 어린 달래는 침을 꼴깍 삼켰고, 어른 달래는 선지해장국과 밥을 퍼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때였다. 달래가 한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리가 한 가족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매일 이렇게 같이 밥 먹을 수 있잖아.”
고기를 굽던 상철도, 수저를 놓던 달래도 순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달래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가족은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달래 언니는 더 좋은 남자 만나서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해야지. 그래야 행복하지 않겠어?”
어린 달래는 상철의 말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랑 같이 살아도 행복할 텐데. 내가 언니 말도 잘 듣고, 말썽도 안 부리고, 공부도 잘하면 되지 않을까?”
달래가 이번에는 달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달래는 어린 달래의 말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상철은 재빨리 ‘정달래, 이제 그만!’이라고 제지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달래도 “고기 다 익었겠다. 달래부터 한 번 먹어 볼래?” 하며 가위로 자른 고기 한 점을 달래 앞에 놓인 접시에 올렸다. 셋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양념 갈비와 국과 반찬을 떠먹었다. 후식으로 시원한 물냉면까지 먹고 난 뒤 상을 치웠다. 달래가 설겆이를 하고 가겠다고 했지만, 상철은 한사코 돌려보냈다.
“설겆이는 금방 끝나. 피곤할 텐데 여긴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쉬어.”
어린 달래도 그게 좋겠다면서 달래의 손을 끌고 배웅하러 나갔다. 두 사람의 손에 등 떠민 달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상철과 달래가 문 앞에서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달래도 두 사람에게 손가락 하트를 보내며 차 문을 열었다. 어린 달래의 눈에 밤하늘 별들이 들어와 총총히 빛났다.
“달래야, 우리도 얼른 정리하고 집에 가자.”
“응 아빠. 오늘은 정말 긴 하루였어.”
상철은 달래의 손을 잡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 탄 달래도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달래가 한 말이 운전대를 잡고 가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다운은 행복동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었다. 쇠락한 원도심 지역이다 보니 주민들의 생활력도 떨어지고, 이웃 간의 정(情)도 사라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행사라면 체육대회가 최고죠.”
주중 첫날 회의에서 쾌한이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공도 차고, 굴리고, 던지고, 운동회 때 하던 박 터뜨리기도 하고?”
쾌한의 설명을 듣고 있던 달래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등산대회와 체육대회를 놓고 고심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등산대회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럼, 행사 이름은 ‘제1회 행복동 한마음 체육대회’로 짓는 게 좋겠군요. 그럼 참가자 접수와 홍보가 필요하겠죠?”
다운이 쾌한과 달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동장님께 말씀드려서 골목과 대로변에 현수막을 걸고요. 거기에 참가 접수 방법을 새기면 됩니다. 마을 방송을 통해 행사 취지와 내용을 안내하면 될 거예요. 참가자 접수는 일주일 동안 진행하고, 접수한 인원을 가지고 저랑 진달래 주임이 무슨 종목을 몇 명이 할 지 나눠 보겠습니다.”
쾌한은 벌써부터 신이 났는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달래도 쾌한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좋습니다. 그럼 저는 체육대회 당일 필요한 텐트와 점심, 행사 보조 인력 협찬을 받아보겠습니다.”
“넵. 한마음 한뜻으로 여는 첫 체육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겠습니다.”
쾌한은 우렁차고 씩씩한 목소리로 다운에게 힘을 실었다. 행사 준비는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회 날짜는 한 달 뒤 행복중학교 운동장에서 열기로 했다.
6개 통에서 200명이 등록했다. 처음 준비한 행사치곤 꽤 많은 인원이었다. 쾌한과 달래는 이들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눴다. 그리고 줄다리기와 공굴리기, 2인3각, 박 터트리기 등 여럿이 함께하는 단체 종목 위주로 게임을 만들었다. 다운은 행복대학 측에 요청해 당일 주차와 행사 진행을 도울 학생 20명을 확보했다. 또 천수만 회장을 찾아가 경품 추첨 행사에 필요한 물품비와 점심 식사 비용 지원을 부탁했다.
“정 소장, 정말 좋은 일 하셨소. 대신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어떤 거죠?”
“저도 대회에 참가하게 해 주세요. 박 터트리기는 어릴 적 운동회 때 말고는 해 본 적이 없군요.”
“네? 하하하. 좋습니다. 회장님도 행복동 주민이니 대회 참가 자격이 충분합니다.”
내심 긴장했던 다운의 표정이 천 회장의 농담에 금세 펴졌다. 두 사람은 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잡았다. 천 회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다운의 다리는 한결 가벼웠다.
한 달 뒤, 행복중학교 운동장. 제1회 행복동 한마음 체육대회가 열렸다. 첫 대회를 축하하듯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운동장에는 그 옛날 운동회를 떠올리듯 만국기가 휘날렸다. 체육대회는 천수만 회장의 축사로 시작했다. 단상에 오른 천 회장은 마이크를 휘어잡고 운동장을 메운 주민들에게 일장 연설했다.
“에, 친애하는 동민 여러분. 천수만입니다. 그간 각자 생활 터전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행복동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뛰고 즐기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 맛있는 음식과 푸짐한 경품도 준비했으니 맘껏 놀아봅시다. 행복동 파이팅!”
체육대회는 청군과 백군 100명씩으로 나뉘었는데, 청군은 정다운 소장이, 백군 주장은 유쾌한 사무장이 각각 주장을 맡았다. 첫 종목은 큰 공 굴리기였다. 남녀 어르신 10명씩 출전해 커다란 공을 굴려 50미터 앞에 있는 반환점을 먼저 돌아오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서는 유쾌한 사무장이 꿈을 찾아준 리어카 끄는 노파를 필두로 문해교실 어르신이 대거 포진한 백군이 여유 있게 이기며 승점 100점을 가져갔다.
다음 종목은 줄다리기. 팀마다 스무 명이 나와 줄을 당겼다. 선수들은 저마다 공사장에서 쓰는 목장갑을 끼고 나왔다. 몇몇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연신 땅을 파댔다. 다운과 쾌한은 청기와 백기를 들고 서서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힘차게 깃발을 흔들었다. 청군과 백군은 영차, 영차 소리를 내며 자기네 쪽으로 줄을 잡아당겼다. 호각지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청군 쪽으로 힘이 쏠렸다. 두 번째 판도 청군 승리로 끝나면서 청군과 백군은 100대 100 동점을 이뤘다.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는 흥겨운 공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칭 행복동 가수로 불리는 인사들이 본부석 앞에 설치한 무대에 올라 뽕짝 메들리를 불렀다. 이어 초등학생 댄스팀은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에 맞춰 현란한 율동을 선보였고, 문화센터 밸리댄스팀도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고 나와 대미를 장식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점심시간이 다가 왔다. 운동장 한쪽에 미리 준비한 출장 뷔페가 먹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청군과 백군은 차례대로 서서 접시에 음식을 담아다 각자 텐트로 이동했다. 텐트에는 긴 테이블 위에 흰색 비닐이 씌어있었고, 포장마차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의자가 인원수에 맞게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곁들인 식사를 하며 함박 웃음꽃을 피웠다. 행복동의 가을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는 보물찾기 시간이 이어졌다. 학교 곳곳에 ‘보물’이라고 적힌 종이쪽지를 찾는 게임이었다. 쪽지 안에는 각종 선물부터 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
상철과 딸 달래는 손을 꼭 잡고 운동장 주변을 돌기 시작했고, 다운도 쾌한과 달래와 함께 눈을 크게 뜨고 보물을 찾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탄성과 한숨이 교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흥신소 직원들은 모두 꽝을 뽑았는데, 유쾌한 사무장만 노트 10권을 뽑아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도서상품권이 적힌 쪽지를 발견한 상철과 가방이 적힌 쪽지를 발견한 달래는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보물찾기는 20분 만에 모든 보물이 발견되면서 조기 마감했다. 이어진 게임은 체육대회의 꽃이라 불리는 이어달리기. 청군과 백군은 남녀 2명씩 선수를 선발했다. 4명이 100미터를 이어 달렸다. 청군에서는 ‘천방지축 나미진’ 멤버인 천태산과 나애리, 방기남, 그리고 장현재가 출전했다. 어느새 현재는 ‘착한 그룹’으로 바뀐 그들 무리에 속해 있었다. 백군에서는 다운과 달래, 상철과 장현재 언니인 미래가 바통을 들었다. 천태산과 정다운이 1번 주자로 출발선에 섰다. 악연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인연은 1년 만에 정다운 사이로 변해 있었다.
“천태산, 어리다고 봐주지 않는다.”
“뭐라고요? 연세가 많으셔서 어디 제대로 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흰색과 파란색 바통을 쥐고 선 둘은 제대로 신경전을 벌였다. 이윽고 심판이 오른팔을 들어 화약 묻은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태산과 다운은 앞으로 튕기듯 뛰어나갔다.
첫 주자들의 경쟁에선 태산이 근소한 차로 다운을 앞지르고 나애리에게 바통을 넘겼다. 다운에게 흰색 바통을 건네받은 달래도 이를 악물고 애리를 추격했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다음 주자를 향해 달렸다. 3번째 주자에게 바통을 이어줄 때쯤 어느새 달래가 애리를 10여 미터 추월했다.
상철은 대기선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달래를 보고 힘을 내라며 응원했다. 그러곤 달래 쪽으로 한 두 발씩 마중 나갔다. 상철을 발견한 달래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냈다. 뒤 쫓아오는 애리도 온 힘을 다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상철에게 바통을 건넨 달래는 가쁜 숨을 헐떡였고, 이어 들어온 애리는 달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무슨 육상 선수였어요? 왜 이렇게 잘 뛰어요? 달려라 하니도 아니고.”
애리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애리의 가벼운 도발에 달래는 눈썹을 활짝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가느다란 눈은 감은 듯 뜬 듯했다.
“나애리,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내 학창 시절 별명이 정말 ‘달려라 진하니’였거든. 하하하.”
달래는 겨우 숨이 돌아온 듯한 애리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애리는 달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사이 운동장에선 어느새 마지막 주자들이 접전을 벌이며 골인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미래와 현재 자매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래가 몇 발 앞서는 듯하면, 금세 현재가 앞지르고, 또 그 반대 상황을 연출하면서 자매는 마지막 직선주로로 접어들었다. 그때 미래가 다리가 엉키며 넘어지고 말았다. 응원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현재가 결승선을 통과하며 백군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순간, 앞서 달리던 현재가 방향을 바꿔 미래 쪽으로 달려왔다.
“언니, 괜찮아?”
현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래를 바라봤다. 미래는 곧장 일어났지만 넘어지면서 발목을 비끗했는지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현재가 미래를 부축하려 했지만, 미래는 한사코 손을 뿌리쳤다.
“지금 경기 중이야. 난 괜찮으니 얼른 가. 니가 결승선에 들어가야 끝나고, 백군이 이기는 거야.”
미래는 현재를 떠밀었다. 하지만 현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언니랑 같이 갈 거야.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난 언니를 버리고 갈 순 없어.”
“이 바보야. 저기서 네가 얼른 들어오기를 바라는 사람들 안 보여? 난 천천히 걸어가면 되니까 너 먼저 들어가라고.”
미래는 현재에게 일부러 화를 냈다. 그래야 동생이 마지막 결승 테이프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재는 물러서지 않았다. 현재의 눈에는 눈물이 담뿍 고였다.
“언니는 언제까지 나를 위해 살 건데? 그동안 언니가 나랑 엄마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며 살았는지 알아. 내가 학교에서 당한 일 때문에 정 소장님을 찾아간 것도 알고 있어.”
“그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힘들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야.”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오늘은 내가 언니를 챙길 거야. 언니, 나랑 같이 가자.”
현재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미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고 기대며 결승선을 밟았다. 운동장에 두 자매를 응원하는 환호와 박수가 울려 퍼졌다.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은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등을 두드렸다. 상철은 절뚝거리는 미래를 업고 교내 의무실로 데려갔다. 그렇게 이어달리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한마음 체육대회는 참가자 전원이 출전하는 박 터트리기 순서만 남았다. 백군과 청군의 점수 차는 불과 50점. 마지막 경기 승자가 ‘오늘의 승자’가 되는 셈이었다. 양 팀 선수들은 저마다 콩 주머니를 들고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 대열을 갖췄다.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머니 던지는 사람들 표정마다 ‘행복’이라는 글씨가 가을 햇살에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