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랬으면 국문학이 아닌, 신문방송을 전공했을 테니. 어쩌다보니 스물 여덟에 신문사 기자가 됐다. 그 나이까지 넌 뭘 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2003년 초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살았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켠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도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잘생기고 멋진 아나운서와 기자들만 눈에 들어왔다. 돌이켜보면, 그날 그 순간이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토익 학원과 방송아카데미를 등록해 이론과 실기를 준비했다. 그다음 KBS, MBC, YTN 등 알만한 국내 방송사에 서류를 들이밀었다. 번번이 떨어졌다. 그렇게 2년 동안 지역 민영방송까지 일곱군데에서 물을 먹었다.
출처: 픽사베이
밥 먹듯이 떨어지자 의지력도, 자존감도 떨어졌다. 당시는 신입 사원 채용에 몇 년 생 이후 출생자라는 나이 제한도 있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싶었다. 공부도, 학원도 그만뒀다. 더는 언론사에 지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더 나았다. 서울 강남에 있는 건설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회사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추운 겨울 날, 카달로그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설계회사를 돌아다녔다.
공대를 졸업한 전문가들 앞에서 문과를 졸업한 햇병아리 신입사원은 잔뜩 쪼그라들고 오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완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자존심이 잔뜩 상해 토목용어사전을 사들고 밤새 씨름했다. 토목 용어를 외우고, 함께 기거하던 노총각 영업부장에게 회사 제품과 시공방법을 배웠다.
설계회사만 돌아다닌 건 아니다. 영업부장을 따라 작업현장을 둘러보고, 하자보수 민원이 들어온 곳에 땜빵도 하러 다녔다. 퇴근 이후에는 관공서 공무원들 접대 자리에 불려 나갔다. 책상머리 영업은 못해도 술자리 영업은 자신있었다. 쇠를 씹어먹어도 소화시킬 수 있는 20대 청춘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아니었다. 술 앞에 장사는 없다. 잦은 술자리와 접대에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한겨울에도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입사 전 84kg이던 몸무게가 90kg 중반을 훌쩍 넘었다. 새벽까지 맥주 열짝을 마셔도 거뜬했던 몸이 초저녁 소맥 몇잔만 들어가도 축축 늘어졌다. 다음날도 숙취에 허우적거리며 하루종일 겔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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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판은 나와 맞지 않아. 접대부도 아니고, 이러다 골병나 죽을 것 같다구.’
불안을 넘어 공포가 엄습했다. 1년 남짓 다닌 첫 직장을 그만 둔 이유다. 접었던 언론고시를 다시 펴볼까 싶었지만, 선뜻 도전하기 망설여졌다. 영어 시험을 볼 자신이 없었고, 20대 후반 나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 조언과 제안이 없었다면, 난 청춘의 한 자락을 허송세월했을지 모른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지인 중에 지역 언론사를 운영하던 분이 계셨다. 말수없던 아버지는 그분께 저녁을 사주고 백수 아들을 써 달라고 사정사정했다. 겨우 입사 허락을 받아온 날, 아버지는 취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높은데만 전부냐? 그런 거 아녀. 낮은데부텀 시작혀봐. 여그서 실력 쌓아놓으믄, 더 좋은디로 갈수도 있을거 아녀. 언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열심히 뛰댕기다보믄 언제 한번 기회는 올겨.”
그 말을 듣고 있넌 난 왜 아버지가 그렇게 화나고, 밉고, 싫으면서도 눈물나게 고마웠을까. 2006년 2월 초, 나는 천안의 한 조그만 신문사에 들어갔다. 그렇게 언론사에 첫 발을 들였고, 그때부터 난 ‘기자’로 살기 시작했다. 햇수로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직업은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더 대견한 건, 내가 선택한 직업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거다.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모습.
지금껏 기자생활에서 화양연화(花樣年華)를 꼽는다면, 단연 청와대를 출입할 때일 거다.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5년부터 청와대를 출입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 5년 내내 KTX를 타고 출퇴근했고, 2022년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마지막 청와대 출입기자’로 남았다. 그 시간의 기억을 책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그래서 2023년 1월 ‘슬기로운 기자생활’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내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경험과 에피소드를 에세이로 엮었다. 현직 기자들의 지침서이자, 기자라는 직업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참고서가 되길 바랐다. 많이 팔리진 않았다. 유시민, 김영하, 김훈 같은 유명 작가가 아니니 당연하다.
첫술부터 베스트셀러를 기대한다면, 그 자체가 욕심일 터. 내 이름을 새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뿌듯함, 그걸로 족했다. 기자에 ‘작가’라는 직업이 하나 더 생겼으니, 더없이 기뻤고, 충분히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