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아타 Nov 29. 2022

지그재그와 빗금

2화

잠이 깨서 침대에 누워 있다. 머릿속으로 시각을 어림해 보고 휴대폰으로 확인한다. 일곱 시 사십삼 분. 출근 시간까지 아직 여유 있다. 하루 삼십 분, 하루 중 가장 쾌적한 시간이다. 몸을 놀리지 않아도 되고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으며 내 맘대로 생각해도 되는 시간이다. 이 느긋한 짧은 순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내 몸속으로 햇빛과 바람이 통과하는 기분이다. 생각이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간다. 

  

집을 구할 때 남향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나는 동향을 원했다. 아침에 햇빛 속에서 잠이 깨고 싶었다. 어차피 내가 집에 없는 시간에 들어오는 빛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창을 열면 옆집 나무들의 뻗은 가지가 누워서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방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동향에다 웃풍 세고 길쭉한 방. 모딜리아니 여자들의 기다란 목을 닮은 방. 창이 커서 겨울이면 바깥의 바람이 무단 침입하는 방. 천장이 턱없이 높아 말을 하면 응응 울리는 방. 아침빛이 가득한 방.

  

올해 초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나는 몇 가지 결심을 했다. 영화 보지 않기, 밤늦게 먹지 않기,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실천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늦은 밤 쓸쓸함을 이불처럼 덮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쑤셨지만 영화를 보지 않고 참는 것은 밤의 공복을 견디는 것만큼 힘들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 결리고 뻐근했다. 어쩌면 나 자신이 텅 비어 있어서 텅 빈 것을 못 견디는 것일지도 몰랐다. 텅 빈 시간은 나를 무척 불안하게 했다. 주변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기분도 들었고, 방 안의 공기가 점점 줄어드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우면 천장에, 옆으로 돌아누우면 벽에 검은 구멍이 생겨나고 점점  그 구멍이 커져서 나를 통째로 빨아들이는 망상에 시달렸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었고, 출퇴근 시간이 남들과 달라 누군가를 만나기도 힘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낮에 만나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각자가 하는 일에 적응될수록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일 년에 두어 번 만나서도 서로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시간을 때우다 보니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영화를 보았다. 노트북에 눈을 내준 채 하루라는 말끔한 콘크리트 벽에 난 틈을 메웠다. 모아 놓은 디비디도 수백 장이었고 다운로드 받아서 보는 영화만도 한 달이면 수십 편이었다. 쉬는 날에는 밥 먹고 잠을 자는 시간을 빼고는 종일 영화를 보면서 보냈다. 하루에 대여섯 편을 연달아 보는 날도 있었다. 때로는 새로 볼 영화가 없을 것 같아 허전해지기도 했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생산되었으므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매일매일 영화를 보는 사이, 나는 점점 공허해지고 있었다. 있을 수 있고 있을 법하고 상상할 만한 수많은 인생과 이야기들을 겪다 보니 실제의 삶이, 무엇보다 내 삶이 점점 시시하게 느껴졌다. 갈수록 인생에 흥미를 잃어 가는 기분도 들었다. 꼭 영화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인생에 흥미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영화 보기를 중단하자 담배를 끊을 때처럼 금단증상이 찾아왔다. 무겁고 딱딱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난감했다. 꾸역꾸역 밀어 넣은 밥알 같은 시간들이 목구멍에 꽉 차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인터넷을 돌아다녀 봤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뱃속 저 아래에서 안달이라는 기생충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즈음 그루브에 가입해서 댓글을 달고 사람들과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영화 속 이야기들이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들처럼 매일 매순간 질주해서 어딘가로 달아났다. 


깊은 밤이면 여전히 천장과 벽에는 검은 구멍이 아귀 같이 커다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겨울 밤 나는 오리털 파카를 껴입고 동네를 무작정 걸었다. 빙판길에 미끄러지고 녹은 눈에 운동화가 젖어 발가락이 꽁꽁 얼어붙었다. 말할 것도 없이 무척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지만 겨울밤의 차갑고 냉랭한 기운에 정수리가 맑아왔다. 밤공기가 드라이아이스처럼 얼굴에 쩍쩍 들러붙었다. 내 메마른 양 볼에 현실이 따갑게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이전 01화 지그재그와 빗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