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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타 Nov 29. 2022

지그재그와 빗금

6화

겨울의 동해는 묵직하고 근엄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한낮이었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옅은 감색의 바다는 희멀건 빛을 꿀꺽 삼키고 시침 떼고 있는 듯했다. 겨울 바다는 사전에서 발견한 낯선 추상어 같았고,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그래서 좋았다. 


나는 문득 바다의 염분 농도와 사람 혈액의 염분 농도가 같다는 말을 떠올렸었다. 뒤이어 파도 소리의 파동이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듣는 소리의 파동과 흡사하다는 말도 떠올랐다. 검게 반들거리는 홍합과 나는 같은 데서 나온 것일까. 우리는 진짜 바다에서 온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기원이 바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태아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고 싶은 걸까. 어째서 나는 이토록 바다가 좋은 것일까. 일이 고되고 힘들지만 적어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였다. 바다 냄새를 맡으면 힘을 내고 다시 일할 수 있었다. 게가 든 박스를 다시 옮겨온다. 얼음이 들어서 아주 무겁다. 게들은 아직 살아서 다리를 꿈틀거린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일이란 건 바다에서 온 녀석들에게서 바다를 씻어 내는 일일지도 몰랐다. 씻고 제거하고 다듬고 자르고 데쳐서 그것들을 말끔하게 해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말끔한 하루는 무엇을 씻고 자르고 다듬고 데치는 것일까. 커다란 양철통에 담긴 홍합을 쓱싹 비벼 대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할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홍합의 수염이 속살을 붙들듯 영화를 붙들고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한 일인 것 같았다. 마음이라는 바다 밑바닥에 무언가 가라앉아 있음이 틀림없었다. 혹시 이런 것이야말로 직업병일까. 이물질을 제거하고 씻어서 말끔하게 다듬으려는 직업의식의 발로, 뭐 이런 것일까. 아니, 아니다. 나는 홍합처럼 검고 딱딱한 껍질을 두른 채 이물질이라도 붙을라치면 쓱싹 떼어 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말끔해지기 위해서. 

  

한 시간쯤 뒤에 다시 주방에 들어온 부주방장은 정신없이 일하는 보조 팀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손이 굼뜨다고 핀잔을 주고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하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면 그렇지, 저 인간의 잔소리는 하루의 레시피다. 소금 농도 하나 딱딱 못 맞추는 부주방장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알지만 종종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에는 속이 꿈틀거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어깃장과 말도 안 되는 재촉과 비하 발언만 없다면  일이 고돼도 참을 수 있다. 일 년만 지나면 칼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고 무엇보다 요리가 좋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셰프의 레시피대로 재료들을 자르고 썰고 다지고 데치는 일이 고작일 테지만 그래도 그날이 기다려졌다. 엄마의 살결을 만지작거리는 것과 감촉이 비슷한 송이버섯을 만지는 일은 매일매일 반복해도 지겹지 않다. 크고 풍성한 브로콜리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으면 언제나 아마존 하늘에서 내려다본 밀림이 떠올라 순간 즐거워진다. 

  

새로 들어온 오징어를 손질하고 먹물들을 통 하나에 모아 두었다. 먹물 통조림을 사면 될 텐데 셰프는 우리를 무척 번거롭게 한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오징어 먹물을 몰래 한 국자 덜어내 내 손과 팔목에 발랐다. 역시나 손금 사이로 빗금 자국들이 드러났다. 하얀 도마 위에 손목을 올리고 사진을 몇 컷 찍었다. 매니저나 부주방장 몰래 하느라 그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사진 속에 든 손은 대리석 조각 같다. 매끄럽게 양감이 살아 있는 손은 마치 단단한 돌 속에서 솟아난 듯 신비롭고 힘이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사진 중에서 하나를 골라 카페 그루브에 올릴 작정이었다. 제목은 당연히 ‘빗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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