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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g Nov 28. 2022

소고기 뭇국

이맘때면 생각 나는 것.


이맘때면 생각이 나는 것이 있다. 하얗고, 매끈하고, 큼지막한 것이, 단단하게 속이 알찬 그것. 바로 가을 무다.   

  

“이 가을 무만큼 보약도 없어. 비타민C도 많지, 소화도 잘되지. 속이 더부룩할 때 무만큼 좋은 게 없어. 얘, 아버지도 봐라, 환절기에 감기 기운 있을 때 뭇국 한 그릇 끓이면 뚝딱 인거.”     


모락모락 김이 나는 뭇국 한 그릇을 내 앞에 놓아 주시며 엄마는 습관처럼 그리 말씀하시곤 하셨다. 사실,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어도 나는 소고기 뭇국을 참 좋아한다. 물론, 남편이야 당신은 고깃국물이면 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라고 반문하겠지만 뭇국은 좀 다른 느낌이다.     


 속을 덮이기로는 밤새 푹 고아진 곰탕이나 갈비탕만 한 것이 없고, 든든함으로는 건더기가 듬뿍 들어간 육개장이나 순대국밥만 한 게 없다. 그러나 담백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냉기에 지친 속을 달래주는 것에 소고기 뭇국만 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푹 삶아진 소고기의 구수한 맛에 더해지는 가을 무의 달큰함이 푹 녹아든 국그릇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뱃속의 써늘한 기운도 어느새 사르륵 녹아 펄펄 날리는 김과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사실 가을 무를 맛있게 먹는 법이야 수만 가지가 있다. 철이 철이니만큼 김장을 할 때 속으로 넣어도, 뜨끈한 국밥과 함께 먹는 아삭아삭한 석박지도,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국물에 소면을 말아 먹어도. 제철 생선과 함께 빨간 양념을 넣고 졸여 먹어도 맛나다. 어디 그뿐이랴, 입맛이 없을 때 찬물에 밥을 말아 쪼글쪼글하게 절인 무 짠지와 후루룩 넘겨도 맛있다. 그도 아니면 잘게 채를 쳐 들기름과 소금을 넣고 휘리릭 볶아먹어도 좋다. 그러나 뜨뜻하게 끓인 뭇국만큼 그 좋다는 가을 무를 온전히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어디 있을까. 


  


“뭇국이네?”     


 밤새 독감을 심하게 알은 큰아이를 번갈아 간호 하느라 두 눈가가 거뭇해진 남편이 곁에서 물었다.     


“태이 감기 때문에 국물 좀 먹이면 좋을 것 같아서.”     

“뭇국 좋지. 나도 뭇국 좋아해.”     

“그래? 당신 칼칼하고 매운 거 좋아하잖아?”     

“그래도 아플 때는 아무래도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이 더 좋잖아. 옛날에 감기 기운 있으면 엄마가 뭇국 끓여 주셨어. 그럼 뭔가 몸이 보신 되는 느낌이 좋더라고”     


‘그래?’하는 표정으로 남편을 올려다본다. 하긴, 괜스레 몸이 찌뿌둥하고 으슬으슬 찬 기운이 몸에 스미면 뜨끈한 국물만큼 좋은 게 없지. 기운이 없어 늘어진 아이를 달래 식탁 앞에 앉힌다. 간밤에 펄펄 열이 끓던 큰아이가 찬찬히 국물에 만 밥을 입에 넘긴다. 아이가 먹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수저를 국그릇에 담근다. 뜨뜻한 국물이 목구멍을 후룩 넘어간다. 좋다.

     

“어때?”     

“맛있어요.”     


때꾼한 두 눈가에 조금씩 빛이 돌아온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적당히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에 전해진다. 밤새 남편과 번갈아 물수건으로 몸을 닦인다, 시간에 맞춰 해열제를 먹인다, 야단을 떨었던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나 보다. 열이 좀 내린 것에 안심하며 “혹시,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라고 묻자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국물 조금 더 주세요.”라며 작게 중얼거린다. 다행이다.     


“이제 입맛이 좀 돌아오나봐.”     

“애들이야 아프면서 크는 거니까.”     


말은 그리 했으나 남편도 미지근해진 아들의 이마를 짚으며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괜스레 나도 푹 익어 말랑한 무처럼 말캉한 아들의 볼을 꼬집으며 “으이그, 그러니까 요즘 감기 조심하랬지?”하고 아들에게 눈을 흘겨본다.     



사실 그렇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크는 것이야 모든 부모의 공통된 바람이겠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그래도 가끔은 오늘처럼 따끈한 국물이 차가운 속을 보듬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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