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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Oct 30. 2020

완벽한 쾌락

2장 : 어둠 속을 마구 나다니다_ 2화

모든 인간들은 살면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 빠질 때가 있다그런 상황에 몰릴 때를 대비해서 저마다의 도피를 위한 구덩이가 하나씩은 있다하지만 잠시 숨어버린다고 바뀌는 것은 전혀 없을뿐더러, 심지어는 아주 엉뚱한 구덩이에 빠져 헤매기도 한다.

 

나의 성적 호기심을 최고 수위로 끌어올리는 자극적인 매력을 마구 풍기는 남자를 아주 가끔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대부분의 남자들은 나를 무서워하거나 불편해한다내가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나의 예리한 본능이 그들의 두려움을 감지한다사자가 양을 탐색하듯이…, 야생이 그렇듯 그저 간식은 될 수는 있겠으나그런 남자들에겐 성적 매력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가끔씩 나타나는 이 짐승 같은 것들은 나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편함이 없다마치 짝짓기 철의 수컷처럼 한껏 자신의 원기 왕성한 매력을 뽐낸다그러한 B는 볼수록 흥미롭다.

 

마치 어느 영화처럼당장 어디 구석이라도 있으면 끌고 들어가고 싶은 아찔함을 나에게 선사한다그런데 이놈이 밀당을 한다뭐야왜 밀당을 하는 거야난 너랑 연애하고 싶은 게 아니라 섹스만 하고 싶다고…, 너도 싫은 눈치는 아닌데 왜 그러는 거야난 최고의 무기를 꺼내 든다솔직하게 말하기.

 

 : 나 섹스가 너무 필요해너랑 하면 아주 황홀할 거 같아그냥 나랑 한 번만 하면 안 돼?

B : 야 너 뭐야나랑 한 번만 자고 싶다고계속하고 싶으면 어떡할 건데?

 : 아니야난 연애 생각 없어한 번이면 족해그럴 거 같아부탁이야.

 

비굴하다고 말하고 싶은가그래 난 섹스를 구걸했다그게 뭐 어떻다고나의 피곤한 삶에 단비처럼 희열을 내려주고 싶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몇 주간의 설득 끝에 그가 동의한다내가 이런 일로 왜 남자를 설득하고 있나 싶다가도, B가 아니면 이 갈증을 채워줄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 같다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오래된 동거녀가 있었던 것이다아무도 모르는…, 그것이 그의 양심에 가책이란 것을 느끼게 하면서나의 요청에 선뜻 응하지 못한 이유였다양심이란신경통 같은 것이다안 걸리면 그만이다. 거참 별 인간이 다 있구나 싶지만도덕적인 가치 기준은 이 자리에서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날짜를 잡았다. (이게 뭐라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준비물도 챙겼다세세한 디테일에 유난히 신경을 쓰는 B는 최고의 섹스를 선사해주마 하며각종 도구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이미 서로의 성적 취향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으므로 완벽한 준비가 되었다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도와줄 와인도 한 병 준비했다만반의 준비를 마쳤다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고조된 상상 속 열기는 더욱 달아올라 곧 수증기가 될 판이었다.

‘그래! 오늘 나는 완벽한 섹스의 황홀경에 빠질 거야. 격렬하게! 이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거야!’  

난 이미 잔뜩 부푼 복어처럼 톡 건들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아직 밝은 대낮이었다너무 늦은 시간은 곤란하다 하여 그의 일정에 시간을 맞춘 터였다드디어 그가 짐이 가득한 더플백을 들고 나타났다시니컬한 표정으로…,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동네에서 이름난 싸움꾼 같은 표정이다

대실이요

당당하게 외치고 모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잠시 어색함이 흐른다와인을 한 잔씩 마신다기분이 노곤해진다. 준비물들을 꺼내고 뭔가 시작해 보려 한다하지만 평소에 의식 없이 할 때는 잘하던 것들도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못하게 된다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입스(yips)’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특정한 동작을 의식적으로 잘하려고 할수록 그것을 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말한다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일에 과도하게 생각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오랫동안 쉽게 해오던 일들을 수행하는 능력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그날이 그랬다나를 만지는 손길에 걱정과 긴장이 넘치고애무의 시간은 점점 길어만 가고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나는 공허함에 불만을 느끼며 불타던 욕망은 순식간에 사그라져 버렸다.

 

아니야아니야이게 아니야내가 상상하던 게 아니잖아이게 뭐야흐흑…, 엉엉엉

 

달아올랐던 수증기는 구름이 되지 못하고 허무한 눈물이 되어 마구 흘러내린다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억울한 기분까지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나의 눈물에 엄청 당황해하는 B는 나를 위로하는 법 따위는 모른다.

B : 뭐야너 왜 그러는 거야와인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너 불감증이니? 등등.. 

B는 패전의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고나는 계속 울어만 댔다.

아마도…, 오늘의 이 완벽한 오락을 위해 엄마의 병간호를 언니에게 맡기고(물론 회사일 핑계를 댔지만). 이 방이 침대에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어 원망스럽기 때문이었을까아니면 이런 걸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나신경통보다 더 나쁜 것에 걸려 버렸군. 완벽한 쾌락에 도전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엉뚱한 구덩이에서 잠시 헤매다가 다시 길을 찾은 기분이다.

 

B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무언가를 증명하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그때 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봤을 뿐나중에 필요 없는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남성적 매력은 거의 0 상태가 되었다방탕한 정신이 찾는 이런 종류의 오락거리는 인간성을 회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허무에 가깝게 만든다. 나의 정신을 쏙 빼내어잠깐 행복감을 느끼게 하다가 금세 사려져 버리기 때문이다.

순간의 행복감이란 한낱 거짓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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