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1월의 이른 출근길, 빙판 위에서 크게 넘어졌다. 지방에서 자란 나는 겨울철 빙판길 부상 같은 건 뉴스에서나 접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해뜨기 전 고층 빌딩들 사이, 응달의 눈길은 정말 위험했다. 몸이 붕 뜬 채로 오른팔을 짚고 넘어지던 그 순간, 어깨에서 뭔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귀에 전해졌다. 병원에서는 오른쪽 어깨뼈 골절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면 되지만 어깨 골절에는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팔걸이로 팔을 몸통에 고정시킨 채 생활해야 했다.
당시는 지점에서 전국 1등 KPI 달성을 목표로 연초부터 가열하게 달리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출 주임이 부상을 당했으니 지점 내에서도 내심 마뜩잖았을 것이다. 다음 날 병원에서 MRI 검사를 받던 중, 인사부에서 전화가 왔다. 병가 및 휴직 등 사후 절차에 대한 안내였다. 물론 합리적인 조치지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건 ‘이렇게 당분간 쉬게 되면 연말 승진은 물 건너가는 건가’라는 걱정뿐이었다.
고민 끝에 인사부와 지점에 당분간 한 손으로도 일해보겠다고 결정을 지연해 달라는 장문의 메시지를 왼손으로 꾹꾹 눌러 담아 보냈다. 그리고는 왼손 전용 마우스를 주문하고 본격적인 왼손 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처음엔 별것 아닌 일상도 고역이었다. 씻는 데도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렸고, 옷을 갈아입는 일조차 쉽지 않아 암홀이 넉넉한 펑퍼짐한 옷을 골라 입었다. 한 손으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 보니 유리컵이나 그릇을 깨는 일도 잦았다. 그렇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나도 점차 요령이 생겼다. 왼손 마우스도 처음에는 버벅댔지만, 며칠 지나니 꽤 쓸 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른손 손가락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어 키보드를 배와 옆구리에 끼고 치는 이상한 자세로 타자를 이어갔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려 애썼다.
어찌 보면 지점에 부담을 주는 상황이었기에 옆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아픈 티도 안 내고 더욱 신경을 썼다. 병원 간다는 이야기도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고 내가 없는 동안에는 뒷말이라도 나오는 것은 아닐지 혼자서 더욱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어깨도 부러지고 시무룩하게 시작했던 한 해였지만 아등바등 적응해 가며 고군분투한 끝에 그 해 지점 KPI 실적은 목표한 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승진도 할 수 있었고. 한 팔로라도 열심히 해보려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덕분이 아닐까 싶다.
제대로 수술이나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어깨가 불편하고 도수치료 등을 받으러 다니곤 한다. 그리고 그때의 일을 교훈 삼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미끄럽지 않은 신발을 신고 출근을 한다. 홍창 구두를 사더라도 반드시 보강업체에 보강을 맡긴다.
마치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었듯, 나 역시 그 겨울,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오른팔 하나는 내어준 셈이다. 물론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그 대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깨의 통증이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있고 그때의 대가를 지금도 분할 상환 중이다.
과정이 결과를 만드는 법이지만 때로는 또 결과가 과정을 좋게 기억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 겨울, 나는 왼손잡이였고 젊은 날의 치기와 투기 같은 것들로 버텨냈기에 그 시절은 이젠 나쁘지 않은 한 페이지로 기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