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청역의 오피스텔에서 계약 만기가 다 되어가던 무렵, 회사의 한 대리님이 을지로의 사택을 비우게 되면서 계약을 내가 이어받게 되었다. 마포구청역 인근의 깔끔한 느낌도 좋았지만 코로나 시기에 빽빽한 지하철 대신 도보로 출퇴근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우연히도 이사한 오피스텔 바로 옆에는 수년 전 은행 동기들과 함께 묵었던 작은 호텔이 있었다. 서울에서 열린 동기의 결혼식에 참석차 넷이서 방 하나에 침대 두 개를 나눠 쓰며 쪼그리고 잠들었던 추억. 그때도 종로의 관수동 명패골목, 구불구불한 보쌈 골목과 생선구이 골목에서 식사를 하며 참 낯설고 신기하다고 느꼈던 그 거리에서, 불과 몇 년 뒤 직접 살게 될 줄이야. 평수는 줄었지만 회사와 청계천 산책길이 가까워져 출퇴근길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느 날 꾼 꿈에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청계천에서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에 거지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전생에 그중 하나였던 건 아닌가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가 있다. 1968년에 지어질 당시에는 판검사들도 살던 고급 주거시설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전자부품, 공구류 상가가 즐비한 곳으로 한때는 ‘설계도만 있으면 로켓도 만들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곳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도청기 관련으로 청계천 전자상가를 찾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도 가면 ‘몰카탐지기’, ‘도청기탐지기’ 광고 전단이 여전히 붙어 있다.
서울시는 몇 해 전, 세운 상가 일대 활성화를 위해 약 1,1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공중보행로를 만들었다. 천문학적 예산이 들 만큼 방문자 증가의 효용이 있진 않아서 세금 낭비다, 철거해야 한다 등의 논의가 끊임없이 나오는 곳이다.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오랫동안 청계천을 지켜왔던 상인들은 도시재생의 이름으로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나는 이 공중보행로 길을 자주 오가곤 했다. 콘크리트로 형성된 거대한 공중 정원. 낡은 환기구와 금속 덩어리 사이로 햇빛이 조용히 흘러든다. 낡고 복잡한 구조물들 사이에 철물상가도 있고 비어 있는 공간들도 있고 그 틈을 비집고 젊은 창업자들도 둥지를 틀고 있다. 철학 전문 서점, 영화 소품 가게, 호랑이라떼 카페, 대림국수집 같은 개성 있는 가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옛 것과 새것이 얽히며 묘하게 잘 어우러진다. 현재의 모습을 지키려는 이들과 도시재생을 추진하는 이들의 대립으로 일대는 시간이 몹시 천천히 흘러가는 듯 느껴진다. 그럼에도 서서히 사라지는 청계천 지킴이들의 모습들을 보며 마냥 이곳을 즐거운 마음으로만 감상하기는 어렵다. 찰나의 순간과도 같은 모습이기에 두 눈과 추억 속에 최대한 많이 담아두려고 한다.
많은 이들의 인생 드라마였던 <나의 아저씨>. 마지막 화에서 시간이 흐른 뒤 박동훈 부장(故이선균 분)과 이지안(아이유 분)이 우연히 카페에서 마주치고 악수하며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라고 독백하는 결말 장면. 그 장면도 바로 내가 거닐던 곳이었다. 출퇴근길마다 그 거리를 지나며 드라마의 잔상과 감정도 되살아나곤 했다. 편안함에 이르렀나. 나 스스로에게도 자문자답을 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떠난 지금도 나는 종종 청계천으로 향한다. 주말 이른 아침,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입구역에 내리면 익숙한 골목과 풍경들이 여전히 그대로다. 청계천을 따라 걷고, 세운상가 공중보행로를 천천히 지나며 다시금 그 시절의 공기와 생각을 떠올린다. 복잡하고 오래된 것들과 새롭고 낯선 것들이 얽혀 있는 그 거리엔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는 구석이 있다. 전생에 청계천에서 살았던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쪽이 자꾸 나를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