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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8 : 10년만에 방문한 강남의 상전벽해

桑田碧海

by 범버맨



대학생 시절엔 자격증 시험을 치거나 채용 관련으로 낯선 서울에 잠시 상경하곤 했다. 마치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오르듯 말이다. 서울에서만 치러지는 CFP(국제재무설계사) 금융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상경한 적이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간 시험이 진행되기에 금요일부터 미리 상경했다. 강남 대치동의 한 중학교가 시험장인데 근처에는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틀간 시험 직전까지 새벽공부를 해야 하니 친구의 집에 신세 지기도 애매했다. 시험장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침 고시원이 하나 눈에 띄었다. 사장님께 사정을 말하고 하루 5만 원에 이틀간 묵기로 했다. 고시원은 3층이었는데 2층의 이자카야를 거쳐 올라가야 했다. 차승원 배우가 광고하는 아사히 생맥주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생맥주 한 잔 가격이 당시 나의 아르바이트 시급이었다. ‘금융권에 취업하면 이런 생맥주도 부담 없이 마시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고시원에서 시험 대비 마무리 공부를 했다. 답답하면 잠시 밖으로 나와 동네를 산책했다. ‘이곳이 그 유명한 강남 8학군이구나.’ 신기해하며 밤거리를 거닐던 기억이 난다.




양일간 시험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차, 총정리 사례집을 시험 직전까지 훑어보곤 시험장 서랍에 두고 온 것이었다. 허겁지겁 시험장 중학교 교무실에 전화를 해서 혹시 시험장에 분실물 중 책 한 권이 있는지 여쭤봤다. 다행히 한 학생이 책을 습득하여 교무실에 맡겨뒀다고 했다. 학생과 선생님의 도움 덕분에 우체국을 통해서 무사히 책을 전달받았다.


첫 시험은 시원하게 낙방했다. 일 년에 두 번의 시험이 있는데 다음 시험은 좀 더 제대로 준비 후 다시 상경했다. 이번에도 똑같은 고시원에 찾아가 사장님께 하루 5만 원에 숙박을 부탁했고 마무리 시험 대비를 이어갔다. 편의를 봐주신 고시원 사장님과 분실 책을 습득하여 우체국에 부쳐준 학생과 선생님 등. 작은 호의와 친절들이 모여 낯선 곳에서 우왕좌왕하던 대학생이 시험도 무사히 치르고 돌아갈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TV를 보고 계시고 시험은 잘 치고 왔냐고 인사를 건넨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미래에 대해 불안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대비하고 있었고 부모님도 아직은 건강하셨다. 낯선 서울에서 며칠 있다가 집에 오니 이 익숙한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 평범한 순간들이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흘러 컨퍼런스가 마침 시험장 근처인 코엑스에서 열려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옛 추억을 회상할 겸 시험장 근처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그 시절 시험 공부를 하다가 들렀던 편의점과 식당 자리는 높은 고층 오피스텔로 변해 있었으며 심지어 묵었던 고시원 건물 자리에는 화려한 백화점 별관이 들어서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걸까. 불과 십 년 사이에 강산이 바뀌어 그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서울에서 살다 보면 ‘부동산(不動産)’이라는 단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라는 이름과 달리 서울의 부동산은 그 어느 것보다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도시의 풍경을 새롭게 만든다. 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변하지 않을 듯 서 있던 건물도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변모한다. 그렇게 서울은 끊임없이 재편되고 사람과 추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나 또한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대도시 풍경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여전히 서울은 낯설고 빠르게 변하며 때로는 압도적인 도시다. 시험을 보던 시절엔 '합격만 하면 은행에도 들어가고 많은 부분이 해결되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학생 시절에는 정면에서 들이닥치는 것들을 하나씩 헤쳐 나가는 기분이었다면 직장인이 된 후에는 정면뿐 아니라 다각도에서 다양하게 들이닥치는 문제들로 펀치드렁크 상태이다. 시험장 근처에서 느꼈던 긴장감과 설렘이 이제는 익숙한 피로와 작은 회한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차승원이 광고하던 생맥주 한 잔쯤은 부담 없이 마실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어렴풋한 긴장감과 설렘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시절도 그립다.


생각해보면 지난 10년 동안 계획했던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기대보다 훨씬 잘 풀린 일도 있었고 부족했던 일도 많았다. 내 인생에도 작지만 분명한 변화들이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다음 10년이 조금 더 궁금해진다. 앞으로의 서울과 내 모습도 지금과는 또 많이 달라져 있을 테니 말이다. 잘한 점과 아쉬운 점을 되새기며 담담하게 앞으로의 변화를 지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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