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초반의 가장 빛날 시기에 나는 가장 울적한 시기를 보냈다. 재수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에 등록한 후 일을 병행하며 일 학년만 다니고 휴학하게 되었다. 하향 지원하여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음에도 부족한 칠십만 원이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당시에만 해도 인터넷 신청이 아니라 은행에 직접 방문하여 자필로 서류를 작성해 대출을 신청해야 했다. 칠십만 원을 빌리기 위해 긴 줄을 기다리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느꼈던 스무 살의 서글픔이 지금도 생생하다.
휴학 후 부모님을 도와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학교를 다니는 것도, 재수를 하는 것도, 군대를 간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였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뒤처지고 나만 정체된 듯한 기분에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깊어졌다. 친구들은 대학 생활을 만끽하거나, 재수에 성공하거나,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내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싫어 친구들과의 연락을 점차 피하게 되었다.
일하며 보낸 2년과 군복무로 보낸 2년, 총 4년의 공백 후 학교에 복학했다. 복학 후에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으로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점철된 나날을 보냈다. 휴학 기간에는 일하느라, 복학 후에는 학점 관리와 취업 준비에 치여 정말 재미없이 지냈다. 지금 다시 이십대로 돌아가라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그 시절은 팍팍함 그 자체였다.
오랜 휴학 뒤에 복학한 탓에 대학에 아는 사람이 없었고, 자연스레 도서관에서 금융자격증이나 영어 공부를 하며 뜻이 비슷한 아웃사이더(아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개그콘서트에서 유세윤이 연기한 촌스러운 복학생 캐릭터처럼, 우리는 거무튀튀하고 어두컴컴한 복학생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여학우들과 엮일 일도 없이 우리끼리 조별과제도 하고, 수업도 맞춰 듣고, 취업 준비도 치열하게 한 것이 유일한 대학생활의 추억이다. 무뚝뚝한 남자들끼리 다정한 격려를 나누는 일은 드물었지만, 같은 목표를 두고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은 지금 각자 전문직, 공기업, 금융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리를 잡았다. 모임을 할 때면 도서관 옥상에서 바람을 쐬던 일, 여학우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일 등 우리만의 시시콜콜하고 찌질한 역사를 회고하곤 한다. SNS도 하지 않고 세상과 단절된 채 지냈지만, 덕분에 짧은 시간에 집중해 많은 것을 준비할 수 있었다. 공부든 돈이든 커리어든, 결국 유의미한 것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겨울밤 눈처럼 조용히 쌓이는 듯하다. 한여름 태양 아래서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흥미롭게도 나의 은행 첫 부임지는 내가 학자금 대출을 받았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입행 후 업무를 보며 옛 대출 서류들 중 스무 살 시절 내가 작성했던 칠십만 원짜리 학자금 대출 신청서를 발견했다.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보는 기분으로 바라본 그 서류는 나를 쑥스럽게도 하고 울컥하게도 했다.
어느 날 주요 거래처 사장님이 방문하여 지점 고객 상담실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셨다. 가끔 업무를 보며 커피 한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시던 분인데, 특히 정치나 경제, 사회 문제에 열변을 토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날의 요지는 대략 이러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눈이 너무 높다. 대학 진학률을 낮춰야 한다.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서 대학을 가는 집안의 아이들은 스무 살부터 빨리 공장에 보내서 나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바로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나 역시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입행한 사람이었지만 그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화를 흘려 보냈다.
지금 나는 예상하지 못한 서울 한가운데에서 은행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학자금 대출 서류를 작성했던 지점에서 내가 은행원이 되었던 것처럼, 그 시절 학생이었던 내가 현실의 직장인이 된 것처럼. 매일 수많은 사람과 건물 사이를 지나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가끔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런 순간이면 잠시 멈춰서, 지난 날의 나에게 어깨를 토닥이고 싶어진다.